작년 일이다. 시험이 끝난 큰 아이가 채점된 시험지를 보며 울고 있었다.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이야기해 줬지만 아이는 속상해했다. 왜 나는 열심히 했는데 공부를 하나도 안 했다는 친구들보다 점수가 안 나온 거냐며 공부하지 말고 놀았어야 했다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놀겠다고 말했다. 응? 그게 왜 그런 방향으로 가나.
큰 아이는 이제 중학교 3학년으로 한 학기에 한 번 기말고사를 본다. 범위가 넓기 때문에 시험 기간에만 공부를 한다고 좋은 점수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시험기간에 하는 공부보다 평소에 하는 공부가 더 중요하다. 평소에 미리 준비를 해 놓고 시험기간에는 해 놓은 것을 토대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아이의 준비는 미흡했고 그래서 시험기간에 넓은 범위를 다 공부하지 못했고, 그래서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예견된 결과라고 해야 했다.
평소 아이에게 공부를 하라고 하지 않는다. 학습의 동기는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독서는 권한다. 공부를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지만,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건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스마트폰의 세계와 손잡고 있는 아이의 주의를 환기하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도 했고 또 시간도 정해 놓아 저녁 8시 이후에는 스마트폰을 거실에 놓아야 한다. 그럼에도 아이는 학습보다, 독서보다, 영화감상보다, 인스타와 유튜브, 게임을 더 많이 했다. 시험기간에도 조절하기 어려워 보였다.
마음을 먹고 아이와 대화를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인 아이와 대화를 하는 일은 아주 많은 인내심이 요구된다. 논리적이지 않으며 무척 감정적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문제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저녁 8시에폰을 반납하는 문제로 아이는 나라를 잃은 것처럼 울며 말했다. 시험성적 잘 나오면 될 거 아니냐고, 그러면 다 자기 맘대로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 엄마는 성적 때문에 스마트폰 시간을 조절해야 한다고 하는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공부를 할 때 네가 얼마만큼 인내했고, 얼마만큼 집중을 했느냐야. 성적은 그걸 보여주는 숫자일 뿐이지. 점수가 높은 것이나 낮은 것으로 너를 판단하지 않아. 어떤 성적을 받는다 해도 너는 내 딸이고 너를 사랑할 거니까, 다만 온전히 집중하도록 노력은 해야 해. 최선은 그렇게 하는 거야.
무한한 잠재력
가능성은 희망이다.
학습의 본질은 성적이 아니라 내면적 성장이다. 점수는 성장과정에서 보이는 중간 결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면은 무한하고 그 성장이 어디까지 이어지고 어디까지 도달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한하므로 잠재력 역시 무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자신은 우리의 극히 일부이다. 그러나 세상은 보이는 결과로 성장을 평가한다. 과정들은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표면적인 결과로 판단하고 평가한다.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단순하며 명쾌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본질이다.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한계설정이나 규칙설정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도구로서 이용하는 것이지 본질이라고 정의 내릴 수는 없다. 자격증이나 지위, 명예 같은 것도 도구이다. 내가 어떤 것을 목표했고 그 목표에 가까워졌는지 자각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이지 목적이나 본질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도구를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전부라고 여긴다. 측정할 수 없는 잠재력이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데도 잠재력을 어떻게 발휘하고 이용할지에 대한 깊은 사유는 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우월한 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여러모로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음>에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현재보다 <나아질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 그래서 희망을 꿈꾸게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전부라고 믿고 판단했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지속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발휘되지 않은 잠재력, 소외된 잠재력을 찾으러 나는 오늘도 떠난다. 신발 끈 담담히 묶으며 스스로에게 말한다. 한계를 정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