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단편소설
오늘의 선곡은 라디오헤드였다. 난 언제나처럼 깁스코르셋을 착용하고 마네킹처럼 벤치에 앉아 무생물의 경지에 다가갔다. 묵묵히 그림을 그리던 고도가 말했다.
“뭔가 다른데.”
“… 어떻게 할까요?”
혼잣말이었는지 고도는 대답 없이 자기만의 상념에 빠졌다.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실은 작업실에 오기 전 엄마와 통화한 내용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간단한 용건이 있어 전화했던 엄마는 친구 아들 얘기로 수다를 떨다 무심코 말했다. ‘걔도 참 병신이지. 나이 서른이 넘어서 연애는 안 하고 즈이 엄마랑 온천여행 다닌다니깐.’ 난 여기 병신 하나 더 있소 하려다 관두었다. 엄마가 나와 같은 인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알게 되었다고 표시하고 싶지 않았다. 한번 표시하면 지울 수가 없어지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엄마 머릿속의 병신 상에서 한발 멀리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엄마를 멀리해야 했다. 부모에게 쓸 시간 따윈 없는 공사다망한 딸로 보이도록.
“왼팔 들어봐요.”
난 왼팔을 들었다. 고도는 캔버스와 날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살 쪘어요?”
“아뇨.”
“쪘어요.”
고도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붓을 놓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난 그의 손에 그놈의 짜증나는 페인팅 나이프가 들렸는지부터 살폈다. 두 손 모두 빈손이었다. 고도는 들고 있는 내 왼팔을 잡고 작업실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선반 밑에 있던 체중계를 발로 끄집어냈다.
“올라가요.”
난 체중계에 올라섰다. 고도는 수치를 확인하고 자리로 돌아와 나이프를 쥐었다. 그는 검은 물감을 한 움큼 퍼서 뒤에 있는 흰 벽면에 크게 숫자를 썼다. 방금 잰 몸무게보다 3킬로그램 적은 숫자였다. 그는 뒤돌아서 나이프로 숫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작업 끝날 때까지 이 숫자 유지해요. 기구가 1킬로는 되니까.”
“그러죠.”
난 명치쯤 차오른 수치심을 내리누르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고도도 캔버스 앞에 다시 앉았다. 그는 붓을 다시 잡지 않고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며 날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그러고 있었다.
“작업 안 해요?”
“네.”
“왜요?”
“모델 살 빠지길 기다려야죠.”
“그럼 내일 하죠.”
“하루치 작업이 날아갔네.”
“이 정도로 예민한 작업이었으면 미리 얘기하지 그랬어요.”
“이 정도는 기본 아닌가.”
“모델료에서 빼세요. 아니면 나중에 하루 더 나올게요.”
“됐어요. 앉아있어요.”
“왜요?”
“그냥 구경하게요.”
“구경한다고요?”
“네.”
“…….”
“살쪄서 보기 좋은 점도 있네요.”
내가 저 사람을 혹여 불쌍히 여겼던가. 혹여 저 사람의 말에 동요했던가. 그럴 리가. 저 사람에게? 믿어지지가 않네.
난 가만히 앉아있었다. 고도는 내 눈을 끝까지 쳐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화가 앞에서 상반신을, 가슴을 드러낸 기구를 착용하고서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는 존재로 앉아있었다. 고도의 머리 위로 내 몸이 갇힐 몸무게 숫자가 보였다. 그의 커피 잔을 보며 목이 말라 침을 꼴깍 삼켰다.
난 눈을 감았다.
“눈 떠요.”
난 뜨지 않았다.
“뜨라고.”
난 대답하지 않았다. 곧 고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난 진정으로 무생물의 경지에 다가갔다.
캄캄한 우물 속이었다. 난 그 안에서 엄마를 불렀다. 위에서 엄마가 얼굴을 내밀어 들여다보았다. 난 반가워서 소리쳤다. ‘엄마! 엄마! 나 여기 있어! 여기!’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난 엄마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난 영을 불렀다. ‘영! 영! 나 좀 꺼내줘! 영!’ 영이 우물 위에서 고개를 내밀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영은 무성의해 보이려 애쓰며 말했다. ‘우리 그만 보자. 잘 지내.’ 영도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난 조를 불렀다. ‘조! 이제 너밖에 없어. 네가 날 구해야 해!’ 조는 우물 입구에 걸터앉아 지휘자처럼 손을 놀렸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해요.’ 그 말을 남기고 조는 뒤로 고꾸라져 사라졌다.
우물이 끝도 없이 깊어졌다. 입구가 점점 멀어졌다. 누군가 몸을 내밀어 손을 뻗어주면 잡고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작은 점이 되었다. 점은 점점 더 작아지다가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난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우물 속에서 밤을 보낼 때.”
고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자리를 비웠을까. 헐벗은 모델 혼자 남겨두고 작업실을 떠났을까. 어쩌면 이곳은 작업실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곳은 끝도 없는 우물 속인지도 모른다. 난 계속 말했다.
“그때도 이렇게 깜깜했는데.”
고도가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였어요?”
“처음엔 엄마한테 혼날까 봐 늦게 발견되길 바랐고, 그다음엔 엄마가 빨리 나타나길 기다렸고.”
“…….”
“내 엄마는 임신하고서 아빠한테 버림받았어요. 그리고 어느 날 내가 우물가에서 노는 걸 놔두고 혼자 집에 갔고, 난 다음 날 실신한 상태로 우물 속에서 끌어 올려졌고.”
“…….”
“내 엄마는 지금도 그날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그게 과연 어떤 기분일까.”
“…….”
“작가 선생님.”
고도는 도구를 건드려 거기 있다는 인기척을 냈다.
“네까짓 게 날 어떻게 해도 소용없어요. 내 우물은 굉장히 깊어서 입구가 안 보일 지경이거든.”
“…….”
“그러니 그 위에서 맘대로 지껄여요.”
난 저주의 여운이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 눈을 떴다. 고도는 먹먹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고도는 내 뒤로 와서 깁스코르셋을 풀며 말했다.
“다신 이런 일 없어요.”
“네.”
난 탈의실로 들어가려다 멈춰 서서 물었다.
“살쪄서 보기 좋은 점이 뭐예요?”
고도는 기구를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둘러댈 말을 고민하는가 싶었는데 있는 그대로 나왔다.
“성희롱이었어요.”
그 당당함에 반할 지경이었다.
“내가 그랬구나 하고 넘어가면 될까요?”
“똑같이 해요, 그럼. 욕하고 싶으면 하고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모욕을 하든 혐오를 하든.”
“내가 왜요?”
“그럼요?”
난 그가 스스로 말하길 기다렸다. 꼬맹아, 이건 아주 쉬운 문제란다.
고도는 내 침묵에 넌더리를 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요. 수수께끼 같은 대화 지긋지긋하니까.”
그는 자리를 떠나갔다. 난 탈의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