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단편소설
초인종을 누르고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안에서 문에 열렸다. 고도가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난 순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역시나 당황하지 않고 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와 코트를 벗자 고도가 뒤에서 받아 주었다.
그래, 그렇게 하기로 했구나. 이제 그가 예측이 되었다.
난 코트를 맡기고 체중계에 올라섰다. 그는 옷걸이에 코트를 걸며 옆에서 내려다보았다. 숫자를 확인하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갔다.
난 탈의실로 가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시작해도 돼요?”
“앉아요.”
수직을 이루는 창가에 내가 한 번도 앉아보지 않은 3인용 감색 소파가 있었다. 난 소파 끝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고도가 커피 두 잔과 마들렌을 가지고 와 반대쪽 끝자리에 앉았다.
“그림은 어때요?”
“나쁘지는 않아요.”
캔버스엔 천이 덮여 있었다.
“아직 보면 안 되죠?”
“돼요.”
“봐도 돼요?”
“안 된다고 한 적 없는데.”
난 커피를 마시며 작업실을 휘 둘러보았다. 평소와 달리 적막했다.
“오늘은 음악이 없네요.”
“듣고 싶은 거 있어요?”
“히사이시 조?”
고도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조작했다. 스피커에서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곡이 흘러나오자 그는 휴대폰을 가운데 빈자리에 내려놓았다. 내가 물었다.
“마지막 날이라 잘해 주는 거예요?”
고도는 피식 웃을 뿐 말이 없었다. 난 마들렌을 하나 집어 물었다. 입에 우물거리며 등받이에 머릴 기대고 천장을 보다가 고갤 돌려 고도를 한번 쳐다보았다. 고도는 물끄러미 날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고도는 영정사진처럼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난 그가 대답할 때까지 계속 마주봤다.
이윽고 고도가 말했다.
“마지막이라 슬퍼서.”
난 다시 천장을 보았다. 그는 의례를 치르고 있었다. 난 오늘 그의 인생에서 죽어 없어질 사람이었다.
“그림 볼래요?”
고도는 캔버스로 가 천을 걷었다. 다가가 보니 그림은 이미 완성이었고 물감도 전부 굳어 있었다. 특별한 점은 없었다. 프리다 칼로의 괜찮은 모작이었다.
“여기서 더 할 게 있어요?”
“네. 조금 남았어요.”
“물감 다 굳은 거 아니에요?”
난 무심코 손을 그림에 가져가다 아차 싶어 거두었다. 그걸 본 고도는 내 손을 잡아 올려 캔버스에 손가락을 대 주었다. 물감은 딱딱하게 말라 있었다.
“덧그려서 마무리할 거예요.”
캔버스에서 뗀 뒤에도 고도는 능청스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내가 빼려고 하면 힘을 주어 붙잡았다. 그것을 몇 번 반복했다.
난 웃으며 잡은 손을 흔들었다.
“그림 그려야죠.”
고도는 웃으며 손에 힘을 풀었다. 그의 손 안에서 내 손이 스르르 빠져나왔다. 그는 내 손가락 끝까지 잡고 있다가 놓쳤다.
고도는 의자를 뒤로 빼고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의자를 다시 당겨 몇 번 톡톡거리며 붓질을 하고는 도구를 놓고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끝났어요. 잠깐 쉬어요.”
고도는 나에게 와서 내 몸에 가운을 덮고 뒤에서 깁스코르셋을 풀어 주었다. 내가 물었다.
“할 게 남았어요?”
“프리다는 끝났고, 간단한 거 하나만 더 그릴게요. 시간 안에 끝날 거예요.”
“그런 얘긴 없었는데.”
“나도 계획에 없었어요.”
“그것도 깁스해요?”
“아니요.”
난 기구에서 풀려나 기지개를 펴고 스트레칭을 했다. 깁스코르셋도 이걸로 끝이었다.
고도가 덮어 놓은 가운을 똑바로 입고 소파로 가서 누웠다. 테이블로 손을 뻗어 접시에 남아 있던 마들렌 하나를 입에 넣었다. 벽시계를 보니 4시였다. 앞으로 2시간. 2시간 동안 그가 이제까지 내게 범한 무례를 압축해서 보여 줄까. 오늘은 나의 장례식. 남김없이 갚은 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난 반만 깨물고 남은 마들렌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바닥에 흩어진 빵부스러기를 고도가 참을 수 있을까.
“청소기 있어요? 먹다가 떨어트렸는데.”
“놔둬요. 내가 이따 할게요.”
“미안.”
“마들렌 더 줘요?”
“네. 하나만.”
너그러운 고도는 빈 접시를 들고 냉장고로 가서 부스럭대며 마들렌을 꺼냈다. 난 발을 올려 창문을 밀어 젖혔다. 열린 문틈으로 서늘한 저녁바람이 쇵 하고 들어왔다. 고도는 마들렌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며 물었다.
“안 추워요?”
난 한숨을 푹 쉬었다.
“춥네요.”
난 열린 창문으로 발을 뻗었다. 발끝이 닿을락 말락 닿지 않았다. 고도가 다가와 내 발을 잡고 다른 손으로 창문을 닫았다. 그는 더운 손으로 내 차가운 발등을 쓸어내리며 소파 팔걸이에 얌전히 놓아두었다. 소파 등받이에 걸려 있던 담요마저 친절히 덮어 주었다.
전자레인지가 땡 하고 울렸다. 그는 다시 주방으로 마들렌을 꺼내러 갔다. 그 등에 대고 내가 물었다.
“다른 그림은 뭐예요?”
“우물 얘기요.”
“내가 해 준 얘기요?”
“네.”
고도는 마들렌을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다. 난 바람 빠진 풍선처럼 팔을 늘어뜨리고 천장만 바라보았다.
“수고했어요.”
난 뒤로 젖히고 있던 고개를 숙이고 머리 뒤로 꺾고 있던 왼팔을 내렸다. 기울어져 있던 상체를 바로 세우고 높은 스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던 엉덩이도 들고 일어났다. 아래로 뻗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뒷목을 주물렀다.
“프리다 5일치보다 이거 두 시간이 더 힘드네요.”
고도는 웃으며 캔버스를 들고 바로 작업대로 갔다.
“안 보여 줘요?”
고도는 작업대에서 등을 보일 뿐 대답이 없었다. 난 포기하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옷을 입고 나오자 그는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햇빛에 두고 말려요. 일주일에서 열흘이면 마를 거예요. 물이나 기름 닿지 않게 하고요.”
“나 주는 거였어요?”
“네. 안 닿게 고정시켜 놓긴 했는데, 그래도 조심해서 들고 가요.”
난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고도는 만남보다 이별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왜 거기서 내가 영에게 마지막으로 띄우던 문자 메시지가 떠올랐을까. 뒤이어 수도 없이 올라오던 ‘왜’가 떠올랐을까. 영을 장례 치르지 않고 보낸 나는 그녀가 내 장례를 치를 기회도 주지 않았다. 나는 영과 무어라도 의식을 치렀어야 했다.
가슴속이 쓸려 내려갔다.
“고마워요. 집에 잘 두고 볼게요.”
“잔금 입금됐을 거예요. 가서 확인해 보고 문제 있으면 연락해요.”
“네.”
“잘 가요.”
그는 일주일이나 열흘 뒤에 다시 와서 가져가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림이 마른 다음에 보내줄 수도 있었다. 마르지도 않은 그림을 번거롭게 포장해 들려 보내며 그는 오늘로 여지 없이 끝을 냈다.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잘 있어요.”
난 작업실을 나왔다.
집에 가는 길에 휴대폰으로 통장을 확인했다. 4시경에 잔금이 입금이 되어 있었다. 지하철 창으로 형광등 불빛이 반복해서 스쳐갔다. 그가 저녁 식사를 권할 때 한번 같이 먹었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집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뻗었다. 오늘의 완벽한 이별을 망치지 않고서는 고도를 계속 볼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완전한 결말을 훼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