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진 4호 투고글
“타인의 안녕을 자주 묻지 못해 온 삶, 늦은 안부를 전합니다. 나마스떼.”
작년에 난생처음 공황증을 겪었습니다. 회사를 나와 한동안 집에서 ‘그냥 있음’ 혹은 ‘존재함’을 수행했습니다. 늘 할 일이 많아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은데, 그 많은 할 일들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생활 루틴도 모두 초기화되고 관계 맺는 법, 삶을 사는 방법마저 잊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잠에서 깨면 또 이 감당 안 되는 하루가 주어졌구나, 정신적인 한숨부터 나왔습니다.
불안을 약으로 잠재우며 점점 리즈시절에 가까워지는 몸무게를 확인하곤 ‘이거 다이어트 되는데?’ 내심 흐뭇하기도 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거울을 보니 가냘픈 비련의 여인이 아니라 누추하고 비루한 환자 한 명이 서 있더라고요.
좀 건강해져야겠다. 그즈음 유튜브로 명상을 하던 저는 관련 영상으로 뜨는 요가 영상을 틀고 방바닥에서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뼈마디가 샅샅이 배기더라고요. 그래서 얇은 여름용 요를 깔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꾸 미끄러지더라고요. 결국 요가매트를 샀습니다. 닭장 같은 옷장 속에 있는 쫄바지며 레깅스도 죄 꺼내 입었습니다. 두어 시간 요가를 끝내고 한 시간쯤 멍하니 있다가 뭘 해야 할지 몰라 또 요가를 몇 시간씩 하곤 했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며 쇠약해진 몸을 다스리기에 요가만 한 게 없었습니다. 다른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도 못하고요.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도 층간소음 일으키지 않고 밤새 할 수 있었죠.
요가에서 제가 가장 감명받은 부분은 수련의 마지막에 행하는 ‘사바아사나’입니다. ‘아사나’는 요가에서 특정 자세와 그를 취하는 과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바아사나를 ‘송장 자세’라고 하는 걸 보면 ‘사바’가 송장이나 죽음이란 뜻인가 봅니다. 사바아사나는 누워서 두 팔과 두 다리를 편안히 뻗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정신은 의식을 유지한 채 몸을 무의식의 상태로 이완시키는 것이죠. 사바아사나에 들어가면 앞선 수련 과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고된 생이 끝났다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힘겨웠던 수련 과정은 치열했던 과거의 삶처럼, 사바아사나는 죽음 뒤에 맞은 편안한 휴식처럼 느껴집니다. 루미의 시 중에 ‘옳고 그름의 생각 너머에 들판이 있다.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리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사바아사나를 할 땐 마치 그 들판에 누워 있는 것 같습니다.
한참 뒤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몸의 의식을 깨울 때는 영혼이 정화된 후 다음 생을 준비하는 마음이 됩니다. 또 피곤한 사바세계로 돌아가야 하는구나. 그래서 사바아사나인가. 그리고 몸을 일으키면 요가라는 활동이 생과 사, 윤회의 수레바퀴에 관한 거대한 은유로 다가옵니다.
그 시기 저는 아마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가량을 요가로 보낸 것 같습니다. 눈 뜨고 있는 동안 잡념이 떠오를 때마다 요가를 했는데, 잡념은 늘 상주해 있었거든요. 이른바 폭풍 요가의 시기. 제가 가장 많이 한 동작은 아마도 ‘플랭크-차투랑가 단다아사나–업독-다운독’으로 이어지는 연속 과정일 것입니다. 자, 쥐뿔도 모르는 제가 감히 요가를 설명할 기회가 생겼네요.
플랭크: 엎드려뻗쳐 자세
차투랑가 단다아사나: 플랭크에서 푸시업하듯 팔꿈치를 구부려 바닥에 엎드리는 자세
업독: 차투랑가 단다아사나에서 바닥을 짚은 두 팔을 쭉 펴 상체만 세로로 들어 올린 자세
다운독: 업독에서 엉덩이를 위로 뾰족하게 접어 올려 산 모양을만든 자세
이는 모든 요가 수련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연속 동작이기도 합니다. ‘빈야사’라고도 부르는 것 같습니다. 업독은 지렁이처럼 바닥에 엎드려있던 차투랑가 단다아사나에서 몸을 일으키는 과정입니다. 허리를 세워 위를 바라보리라. 바닥을 치고 일어서리라. 대자연 앞에 보잘것없는 자그마한 인간의 상승 의지를 표현하는 동작 같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다운독은 몸을 꼿꼿한 산처럼 ‘ㅅ’ 자로 만드는 자세입니다. 전신에 힘을 골고루 분배한 상태에서 숨을 고르고 몸의 정렬을 가다듬는, 다음 흐름을 준비하며 잠시 정체하는 시기입니다.
폭풍 같은 업독을 수개월 동안 몇 번이나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 아직 업독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언덕 위엔 여전히 때때로 폭풍이 불고, 히스클리프는 애초부터 없었고요. 언제쯤 평온한 다운독에 다다를 수 있을지. 어쩌면 밑바닥이란 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닿으려면 한참을 더 내려가야 할지도요. 제게 자존감이란 후천적으로 발명해 벽돌 하나부터 쌓아온 것이라 다른 건 몰라도 내구성은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복병 같은 제 토양이 생각보다 많이도 유약했던 것 같습니다. 가진 땅이 이것뿐이라 곤란하지만 또 어떻게 잘 다져봐야겠네요. 계속 팔에 힘을 주고 고개를 쳐드는 수밖에요.
여름용 요 위에서 쫄바지를 입고 수련하던 저는 이제 제법 선호하는 요가복 브랜드도 생기고 폼롤러나 요가블럭 같은 보조용품도 몇 개 구비했습니다. 현재는 고양이들이 요가매트를 잔뜩 긁어놨는데, 그러기 이전부터 이미 다음에 살 제품을 정해놓았죠. 요가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모니터링하며 SNS에 올리다 보니 제 계정은 어느새 요가스타그램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타임라인에는 요가복 광고가 즐비하게 뜹니다. 정신줄을 조금만 놓으면 탕진각인 것이, 이것이 장비의 세계인가 싶습니다. 여러모로 곤란하지만 뭐, 나쁠 것도 없네요.
아주 최근에는 근육통과 관절통이 온몸을 뒤덮어서 고생을 했습니다. 원인을 찾아보니 수 개월간 폭풍처럼 진행된 요가 수련에 몸이 과부하가 걸렸더라고요. 운동의 ‘운’ 자도 모르면서 얼마나 무식하게 움직여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지금은 하루 한 시간 이내로 수련을 하고, 끝나면 스트레칭과 폼롤러를 이용해 근육을 풀어줍니다. 또, 닭가슴살을 먹으며 근육의 재료를 공급해줍니다. (세상에, 내가 닭가슴살이라니.) 그러니 통증이 잦아들고 몸이 항상성을 회복하더라고요. 역시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인간은 한계 확인과 시행착오의 동물인가 봅니다. 제 몸과 마음에 알맞은 삶의 패턴을 찾아가며, 오늘도 폭풍의 언덕에서 요가를 합니다.
“때로 무력하게 견인되어 가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최근 무너졌던 저를 견인해준 요가에 관해 써보았습니다.”
문학작품 속 좋아하는 장소: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 속 영원의 숲. 자기 의심을 품는 순간 자아가 분열되는 미궁의 숲입니다. 타자화된 나를 마주치면 자신의 고유성에 위협을 느껴 극렬한 살해 욕구를 느끼게 되죠. 그래서 그를 죽인다면 그에게로 분열되었던 자아 일부를 영원히 잃게 됩니다. 온전한 자신으로 숲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