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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Apr 20. 2022

11화. 다른 의미의 눈

겨울. 군 관사에 찬바람이 불면.

아침은 늘 분주하다.

아이들의 내복 상태가 불량해 다시 구매하러 나가고 싶어졌다. 쇼핑을 하러 간다는 얘기만 나와도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들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키를 보니 문뜩 거울을 보고 싶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나의 얼굴은 주름이 보일 것만 같아 속상한 마음이 든다.  뱃살이 많아도 예쁘다는 엄마를 늘 생각해주는 아이들과 지내다 보면 아직도 20대에 살아가는 것 같다.

기분 좋게 옷을 갈아입고 외출할 준비를 한다. 제일 좋아하는 가방 하나씩 매고 나서는데 밖에 함박눈이 보기 좋게 내리고 있었다. 사방이 막혀 있는 집에 있다 보면 밖의 날씨를 보지 못할 때가 많은데 오늘이 딱 그날이었다.


군 관사가 이렇게 새하얗게 뒤덮인걸 보니 밤새 내린 눈이었다.  

벌써부터 눈으로 뒤덮인 차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빠들은 윈도 와이퍼를 세우고 차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눈이 오면 너도 나도 분주해지는데 우린 왜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딸아이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다들 나왔는데 왜 안 나오냐고 묻는 친구.

벌써 군 관사 아이들은 하나둘씩 나와 눈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쇼핑은 다음으로 미루고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즐기기로 했다. 

옷을 더 단단히 입히고 장롱 속에 넣어둔 아이들 장갑을 꺼내 착용하는 걸 도와주었다. 얼마나 빠르게 커버리는지 장갑도 이젠 작아져버렸다. 오늘만 좀 버텨 보자고 꽉 끼는 장갑을 착용하는데 그래도 좋다며 웃는 아이들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쏜살같이 나가는 첫째 아이를 따라 둘째 아이와 손잡고 눈을 즐기러 나갔다.


아이들은 여기저기 모여 눈싸움을 시작했다.

눈이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니 목소리는 더 즐거워지고 행복해 보인다. 언제 편은 갈라졌는지 자동차를 방패 삼아 전투를 시작한다. 그중 에이스인 아이는 눈길이 미끄럽지도 않은지 잘도 달린다. 역시 눈싸움에서 일인자는 다르다. 지는 싸움을 하는 건 은근히 자존심을 갉아먹는 싸움이 된다. 뾰로통하니 불만 섞인 표정들이 나오자 놀이를 바꾸기로 했나 보다.

한 아이의 권유로 빨간 눈썰매가 등장했다. 너도 나도 빨간 눈썰매를 보자 흥미롭게 쳐다본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내리막을 찾아 떠난다. 적당한 곳을 찾았나 보다. 3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의 내리막.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렬로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린다. 짧은 구간을 백 프로 즐기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니 당장이라도 눈썰매장을 데리고 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아쉽게도 코로나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이곳의 3초를 한껏 즐기기로 했다.


뒷줄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둘째 아이를 보았다.

아직은 무서운지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게로 달려온다.

나는 아이와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사람 가족을 만들어 집 앞 계단에 놓았다. 덩치 큰 눈사람은 형아들이 만들길 바라고 우린 작은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다. 동그랗게 굴려 몸통을 만들고 그 위에 얼굴을 얹어놓았다. 아이가 나뭇가지를 찾으러 눈 속을 헤집고 다녔다. 나뭇가지를 구해오더니 양팔을 만들어준다. 그렇게 완성된 눈사람 가족은 우리 아파트 계단에 놓였다. 우리 가족이 완성되었다며 좋아하는 아이. 다음에는 아빠와 더 큰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내 본다.


걸음마하는 옆집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눈을 굴린다.

자동차 위의 하얀 눈은 걸음마하는 아이의 즐거운 놀이터가 된다.  세상 귀여운 장갑을 끼고 눈을 움켜쥐며 신기해하는 아이. 엄마는 감기 걸릴까 노심초사하지만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 날이 언제 올까 생각하는 것 같다. 이날을 위해 눈 오리 모형틀을  꺼내 아이에게 쥐어준다. 눈 오리 틀에 눈을 꽉꽉 채워 보기 좋게 나열해 본다. 금방이라도 엄마 오리를 찾을 것 같은 작고 약한 귀여움. 오늘은 걸음마하는 아이가 힘센 엄마가 되어본다.  


함박눈이 즐거움을 선사하는 동안 한쪽에선 동마다 주어진 제설도구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사실 제설도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눈을 치우는 용도로 사용하는 군인 아빠들을 보고 알았다.

군인들은 눈이 오면 쓰레기가 하늘에서 내린다고 생각한단다. 내리는 눈이 예뻐 보이지 않는 이유는 군부대 안의 모든 눈을 깨끗이 치워야 하기 때문이다. 눈 때문에 그토록 고생을 해서 그런지 눈을 달갑게 생각 안 하는 게 나로서는 참으로 안타깝다. 맑고 청명한 날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이렇게 함박눈이 내리는 날은 드물다. 너도 나도 눈을 보며 즐거워해도 아까운데 쓰레기로 본다니 세상에 태어나 누릴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을 참 쉽게 거부한다 싶었다.

나는 눈을 치우고 있는 군인 아빠들을 보며 함께하고 싶었다. 집 앞의 눈 정도는 내가 치워야 지란 생각으로 제설 도구를 집어 들고 눈을 치우고 시작했다. 보드라운 눈이  한쪽으로 밀리는 기분은 참 재미났다. 바닥이 드러나고 깨끗해지는 순간을 즐기며 눈을 한쪽으로 모아놨다. 나처럼 눈 치우는 재미를 느끼고 있는 친구 엄마가 말을 걸어왔다.

"강원도에 있을 때 눈이 엄청 와서 이쪽으로 이사 오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여기도 눈이 많이 오네요~"

이곳에 이사온지 일 년도 안됐지만 나도 처음 본 눈이라 엄청 감탄하고 있었다. 흩날리는 정도였다면 지나쳤을 눈이 눈덩이로 내리니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저도 이사 와서 처음 보는 눈인데. 오늘 눈 정말 많이 오네요. "

친구 엄마와 난 아파트의 눈을 다 치울 기세로 오며 가며 아는 체를 하며 거리의 눈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내 허리춤까지 올라갈 만큼 눈이 한데 모이니 꼬맹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눈을 찾으러 다른 곳에 갈 필요가 없이 모아놓은 눈들을 굴리기 시작했다. 눈 오리, 눈 사람을 만들던 아이들.  난 재미 삼아 눈을 치우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은  모아놓은 눈 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눈 속을 빠져보는 쾌감은 오늘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리는 눈을 보며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르게 받아들인다.

누군가에게는 쓰레기로 불릴 만큼 지겨운. 그냥 지나치고 싶은 하얀 먼지라면 누군가에게는 오늘 아니면 안 될 특별한 파티에 뿌려질 하얀 꽃가루일 것이다. 분명한 건 군 관사 아이들이 느끼는 눈은  추억의 한 부분을 차지할 그 이상의 것이다. 주말에도 보이지 않던 가족들이 모두 나와 눈을 쓸고 아이와 함께 눈을 굴린다.

서로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조차 묻지 못했던 이웃을 만나게 해 준 오늘의 함박눈이 서로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어 기분 좋음을 더해주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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