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람들과 상호작용 한다는 것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던 녀석이 겉도는 환경을 지나 친구가 생기기까지

by 단휘

그 해 여름, 까만 캡모자를 눌러쓰고 까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자리에 앉아 OT에 참여하던 녀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사람들과 책상에 둘러앉아 있으면서도 그다지 그들과 상호작용할 생각이 없었다. 6주에 걸쳐 진행되는 청년이음센터 OT 기간 내내 나는 적당히 아무 자리에나 앉아 가만히 책을 읽다가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책을 덮고,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바로 집으로 가곤 했다. 가끔 말을 거는 사람도 몇몇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스쳐 지나간 존재로 완전히 잊힌 이들이다. 통성명조차 제대로 할 의지가 없었고 난 내가 누구든 저 사람이 누구든 그저 one-of-them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그들 사이에서 기억되고 싶지 않았고, 식별 가능한 어느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았다.


인간관계를 개선하고 싶고 유의미한 상호작용을 하고 싶다고 지원사업에 참여 신청을 했으면서도 청년이음센터 활동 초창기인 5월에서 8월까지는 그렇게 사람들을 경계하며 그저 프로그램만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몇 번의 OT 사이클이 돌아 새로운 청년 분들이 더 많이 늘어났고 점점 더 모르는 사람투성이인 와중에 가끔 날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도 있긴 하더라. 나에게 인사를 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는 데까지는 보통 시간이 더 걸렸지만 말이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군지 모르겠는 사람도 있고,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까지는 기억나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나를 알아서 영 감도 안 잡히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한두 명씩 늘어나긴 했다.


별로 튀고 싶지 않아 하는 것치고는 튀는 녀석이긴 했다. 극초반에는 튀지 않으려고 해 봤지만 결국 포기했다. 여름에 남들처럼 반팔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크림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은 피부를 태워먹으면 될 문제였지만 (누가 들으면 피부 노화가 어쩌고 하는 잔소리를 하겠지) 에어컨은 쉽지 않더라. 에어컨은 뭔가 시원하기보다는 뼈가 시린 느낌이다. 그런데 포기하는 김에 너무 포기한 모양이다. 괜히 건드리고 놀 얼룩 능소니 인형을 가지고 다니다가 그 인형으로 캐릭터성이 굳어진 것 같다. 내가 얼룩 능소니 인형이라고 부르곤 하지만 그 인형의 대중적인 이름은 "샹샹 10일 인형"이다. 우에노 동물원에서 바다 건너온 아기 판다 인형이다. 직접 사 온 건 아니고 선물 받았다. 아기 곰은 능소니고 판다곰은 얼룩이 있는 곰이니까 얼룩 능소니라고 부르고 있다. 몇 해 전인가 푸바오 팬 커뮤니티에서 꼬마 얼룩곰이라는 닉네임을 쓰던 때부터 나는 분홍 회색 조합의 꼬맹이들을 좋아했다.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는 기간이 길지 않은 게 아쉽고, 무엇보다 그런 꼬맹이 굿즈는 에버랜드에 거의 없다는 것도 아쉽더라.


하여간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식별 가능한 개체로 인지하게 되는 데에도 그 얼룩 능소니 인형이 한몫 한 모양이다. 사람들이랑 대화하다 보면 서로 참여한 프로그램이 다르다 보니 '지금 언급할 그 사람을 저 사람도 알던가?' 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때로는 프로그램에서 보긴 했는데 이름은 모른 채 스쳐 지나간 사람들도 있어서 "누구누구 님 아세요?"라는 말로도 확신이 안 설 때도 있다. 나중에 들은 건데 그런 상황에서 내 이름은 몰라도 판다를 언급 하면 "아 그분...!" 하고 누군지 아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하더라. 사실 이 나이 먹고 판다 인형 들고 다니거나 판다 모자를 쓰고 다니는 녀석은 흔치 않긴 하다. 당장 지난주만 해도 전통무예 체험 프로그램은 마치고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던 중 다음 타임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 분이 익숙한 판다 모자를 쓴 사람을 본 것 같다며 인사할까 하다 말았다고 DM을 보내시더라. 적당히 닉네임을 써야 되는 상황에서도 판다와 유관한 닉네임을 사용하곤 하고. 어느 정도 친해진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판다를 보면 내가 생각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조금씩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생기면서 몇 개월 지나자 그럭저럭 친분이 쌓이는 사람들이 생겼다. 아무래도 각자의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보니까 구체적인 상황은 달라도 서로가 각자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안다는 느낌이다. 저 사람이 저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는 게 기본으로 깔려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때로는 타인에게 상처 주기 싫어서 지나치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있고, 사회성 부족과 사회적 고립의 악순환으로 문제 행동을 자주 하는 사람도 있고,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그래도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대하기 편했던 것 같다.




사실 그 어떤 상호작용도 하지 않고 지냈던 OT 기간에도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게 싫었던 건 아니다. 먼저 다가가기를 주저했을 뿐, 오히려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었다. 다만 이 OT가 끝나면 언제 또 보게 될지 알 수 없는 이들에게 유의미한 관계성에 대한 기대를 품고 싶지 않았다. 6번의 만남 동안에라도 잘 지내면 되는 거 아닌가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짧은 만남만으로 내가 상대를 기억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한두 명씩 만나는 거라면 모를까 그렇게 다수를 한 번에 마주하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모두를 한 번에 알려고 하지 말고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 위주로 한두 명씩 알아가면 되지 않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그게 안된다.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테이블의 사람들에게 집중하지를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까진 아닌 모양이지만 말이다. 결국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가 누군지 못 알아봄에 실망한 채 떠나가는 일을 자주 겪다 보니 내가 상대를 어느 정도 온전히 알아볼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아는 척도 안 하게 되는 것 같다.


사람 자체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어떤 대화를 누구랑 했는지도 기억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특정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보다는 그저 타임라인에 독백을 늘어놓는 트위터 생활을 많이 했던 탓일까. 어떤 말을 했던 건 확실한데 그 말을 한 대상이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녀석이 되고 싶지도 않은데. 그러다가 말을 아끼게 되는 경우도 꽤나 있는 것 같다. 요즘도 이걸 자주 헷갈려하는데, 소수의 친한 친구가 생기니까 내가 이 주제로 이야기를 했을 만한 상대가 이 친구 밖에 없으니 이 친구에게 말했겠거니 하는 느낌으로 적당히 넘어갈 수 있게 된 것 같다. 친한 사람이 많아지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그럴 일 없으니 상관없겠지.


청년이음센터부터 청년기지개센터까지 함께 하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 일부는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지만 따로 연락처는 교환하지 않은 채 그저 가벼운 지인으로 지내고 있고, 일부는 소셜 미디어 계정을 서로 팔로우하며 가끔 일상을 공유하곤 하지만 깊게 관계 맺지는 않은 소소한 주변인으로 지내고 있고, 아주 극소수지만 센터 프로그램 외적으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녀석들도 생겼다.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 다양한 상호작용을 겪었다. 인맥 스펙트럼 상의 다양한 위치에 여러 사람들이 생기고 나니 인간관계에 대한 욕심은 많이 줄어들었다. 사회성 측면에서도 이전보다 많이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막연하게 수를 늘리고 싶다는 생각도 이제 사라졌다. 지금 정도의 질과 양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적정치에 가깝다는 느낌도 들고 말이다. 그렇다고 오는 사람 거부하고 가는 사람 막아서지는 않겠지만, (사실 가는 사람은 막아서고 싶을 때가 있긴 하다. 다만 최대한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따르고 싶다는 마음을 앞세울 뿐.) 여기서부터는 흘러가는 대로 두려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언제는 안 그랬냐, 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대놓고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고 어필하는 일도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게, 내가 먼저 들이대는 경우 오히려 안 좋게 끝나는 경험을 10대 중후반에 여러 번 하다 보니 징크스처럼 남은 것 같다. 그래도 흥미를 느끼는 상대는 여럿 있었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서 괜히 집 가기 아쉽다고 남아서 카페에 가거나 좀 더 대화를 하다 가기도 했다. 그저 함께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존재하곤 했다. 그게 누구라도 좋을 때도 있었고, 특별히 더 함께 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때도 있었다. 초반에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감정이 더 컸다면 언제부터인가 점점 더 특정 개인들에 대한 감정으로 변해갔던 것 같다. 하여간 처음에는 사람들을 경계하면서도 누구라도 곁에 있길 바라는 모순적인 상태로 프로그램에 임했다. 경계를 푸는 데에도 오래 걸렸고 그 '누구라도'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오래 걸렸다. 청년이음센터와 청년기지개센터까지 거친 후, 지난 연말쯤 되어서야 겨우 이런 상태가 된 거려나.

keyword
이전 02화지금까지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