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 그 끝에서 술을 끊고…
어렸을 때 시인이라는 직업을 떠 올리면 가장 먼저 떠올렸던 사람은 김소월 시인이다. 시를 좋아했다기보다는 이름이 너무 멋있잖아. 하얀 달이라니. 이름부터가 시 같은 사람이라 어렸을 때 가명 짓기 놀이를 많이 하게끔 해주신 분이다. -말장난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진심이다- 그렇게 시인은 멋진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시곗바늘이 나의 얼굴에 하나 둘 상처를 낼수록 시인은 우울하고 개성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꽃을 그려 옆에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인들이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최영미가 잔치상을 주인 대신 치워주었고 최승자가 매독처럼 나를 지배하였다. 그러니 시인이란 긴 우울 속에서 자신을 퉁탕거리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프레데리크 쇼팽이라는 폴란드의 피아니스트가 있다. 내가 이렇게 소개하는 게 너무나 어색할 정도로 유명한 이 피아니스트는 별칭답게 많은 사람들에게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곡으로 유명하다.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는 "이"는 나에게 쇼팽의 녹턴은 부드러운 유리구슬이 고운곳에 흘러가는 듯한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에게 언제나 그의 음악은 내가 가진 시인이라는 직업에 편견만큼이나 너무나 독립적이고 강렬하다. 녹턴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형식의 음악임에도 그의 음악은 뭔가 특별하게 느껴진다. 듣다 보면 ‘아니 이 선율에서 여기까지 건드린다고?’라는 생각이 들며 안정적이 다기보다는 칼집 없는 칼을 들고 끝없이 마음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음악에는 도대체 무슨 힘이 있는 걸까.
쇼팽의 발라드 1번부터 4번까지를 다 듣다 보면 인생은 결국 회전목마를 타고 위아래로 춤을 추는 게 우리의 삶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쪽손으로 받쳐줌과 동시에 아름다움이 연주되고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면서도 주변을 환기 시킨다. 쇼팽의 삶에 대해 서술해 놓은 위인전이나 글들을 읽으면 심약하고 내성적이며 소심한 성격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그런 사람이 사랑을 이렇게 격정적이고 영웅처럼 표현할 수 있을까? 심지어 4번에 이르면 화려하지 않음에도 큰 울림들을 주며 마치 인생을 달관의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도 느껴진다. 그는 한없이 떨어질 것 같은 순간에서도 회전목마처럼 다시 올라갈 것을 알고 그 모든 것을 참으며 음악을 만든 것은 아닐까. 혹은 떨어지는 순간에도 펜을 놓지 않았기에 그의 음악은 높이 날 수 있었을지도.
내 삶이 더 떨어질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술을 끊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오랜 작은 꿈이었던 글을 써보기 시작했다. 정말 매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질 않기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잊을 수 없기에. 술을 먹지 않으면 죄책감을 덜어낼 수 없기에. 술을 끊고 내 삶이 더 나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살아있기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맨 정신으로 살아 있으면 잠을 잘 수 있고 잊지 않고 준비할 수 있고 죄책감을 덜기 위해 사과하고 반성할 수 있다. 동정을 받아서 한 끼를 빌어먹어도 살아있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나는 이 긴 터널 속을 지나면서 받은 사랑과 동정들을 잊지 않으면 된다. 살아있으면 더 크게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가 올지 모른다.
동정을 받고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살아가는 것이 너무 위선처럼 보일까?
그런데 위선 아닌 게 어디 있을까 싶다. 아름다운 사랑, 진짜 친구, 사랑이 아름답고 우정이 진실하다면 수식어가 필요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 가능한 최선을 살기 위해 우리는 회전목마 위에서 수식어를 붙이고 어떤 이는 시를 쓰고 어떤 이는 곡을 쓴다.
로만 폴란스키의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를 참 좋아한다. 영화 내내 무겁고 암울하며 비관적인데 그 와중에 연주되는 모든 음악은 “쇼팽”의 음악이다. 그 음악 하나로 주인공은 몸에 맞지 않는 옷 한 벌을 구해가며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우울함 속에서도 퉁탕거리며 살아가 보자. 누군가 찾아와 안아줄지도. 옷 한 벌을 선물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