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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단테 Nov 20. 2022

하이네켄 없이 바라본 파도의 쓰임

알코올 중독에도 파도를 좋아해.

파도를 걷는 소년


캠핑

자연을 벗 삼아 휴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참 매력적이지만 평소 캠핑 짐들을 집에 보관해야 한다는 점에서 캠핑족이 아닌 나에겐 너무 무서운 것이다. - 그것들을 깨끗하게 씻어 관리하는 것도 -  그래서 그 무서움을 벗어나기 위해 내 나름대로 캠핑에 대한 정의를 다르게 내렸는데 자연에서 의자 하나를 놓고 자연 속에서 휴식하고 책을 읽다가 늦은 밤 호텔에서 푹 쉬는 것이다. 많이 우습겠지만 나에겐 이게 캠핑이다.  그래서 차 트렁크에는 항상 접이식 의자가 있다. 갑자기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 지루한 운전의 시간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 바로 트렁크에 있는 의자를 꺼내어 원하는 위치에 박고 가만히 앉아서 풍경을 구경한다. 그중 최고의 풍경은 모래사장이다. 가만히 앉아서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까지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하는 고민들은 정말 이 위대한 자연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단주를 하기 전에는 이 자연 속에서 꼭 하이네켄을 마시고 있었다. 하이네켄은 네덜란드 맥주인데 너무 가볍지 않으면서도 특유의 도시적이고 깔끔한 청량감이 있다. 바다를 바라보며 하이네켄을 마시면 성공한 프리랜서가 자신의 바다 별장에서 여유롭게 자신의 성공을 만끽하는 느낌이랄까. 바에서 마시거나 집에서 마시던 하이네켄과는 분명 맛이 다른 느낌이 있다.


단순히 술안주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 파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몇 달 전에, 재능이 많고 수완이 좋은 여성 사업가 "이"와 마음 깊숙이 있는 고민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두어 시간 정도 각자 삶의 철학과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마 올해 나누었던 대화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말을 돌려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하되 예의를 갖추고 상처 주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대화의 기술이 다르다 보니 나와 다른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방법에 많이 혼란스럽고 상처받을 때가 있다. 이런 내용들의 고민을 "이"에게 털어놓게 되었는데 마침 "이"도 회사에서 비슷한 문제를 겪고 나름의 방법을 찾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기에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줄 수 있었다.


"타인과의 대화 흐름을 파도의 모래처럼 그대로 받아들이고 파도가 지나가면 그다음 파도들만 생각하면 돼요. 그 지나간 파도가 모래를 좀 쓸고 지나갔다고 해서 단테 씨에게 큰 영향을 주진 못해요."


대화의 뒷면을 의심 없이 그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주는 분을 참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좋았는데 저렇게 멋진 표현을 해주시니 감동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도가 내게 다가와도 모래사장의 모래들처럼 그대로 흡수하고 조금 쓸려나가고 때로는 잠기더라도 나는 그 자리에서 나의 생태계를 잘 이루고 살면 그만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대화 이후에 며칠 동안 좋은 풍경의 바다와 곱디고운 모래사장이 보고 싶어졌다.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그려놓고 싶은 바다가 생겼다랄까. 예전에 수많은 여행 속에서 마주쳤던 모래사장과 에메랄드 빛 바다는 어디에 두고 이제 와서 필요하다며 또 여행을 가고 싶다고 이러는 건지... 해외는 현실적으로 힘들었기에 동해 바다가 급했다.


그렇게 울산을 가게 되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경주여행을 갔다가 굳이 숙소를 울산까지 잡았다. 하루 경주를 여행하며 내 꿈속에서 악당들을 수천번 죽이는 데 사용되었던 청동검의 크기가 2m가 아니라 30cm 정도였다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그날 밤 꿈에 악당들에게 두들겨 맞은 후 다음날 아침 5시 무렵. 바다를 보면서 러닝을 하고 싶어 일찍 나왔다. 숙소에서 약 5분 거리에 있던 동해 바다는 10년 만에 만난 나를 너무 반겨주었다. 하늘, 바다 그리고 파도는 내가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웅장했고 나를 우주의 먼지로 만들어주는 느낌이었다. 모래사장 대신 자갈들이 깔려있었지만 파도가 한번 지나갈 때마다 들려주는 자갈들의 아름다운 소리들. 영화 '노킹온 헤븐스 도어'의 루디와 마틴이 마지막 바라본 바다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에 러닝을 잊은 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약 한 시간 동안 파도소리를 들으며 러닝을 하였고 러닝이 끝날 무렵 바다를 가르고 하늘의 품에 안기기 시작한 태양이 뜨거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 일출을 바라보는 것일까. 뜨거운 빛에 러닝 하며 흘렸던 땀들이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기 시작했고 벅찬 가슴으로 바다, 하늘, 일출, 그리고 파도를 눈에 담았다. 잊지 않고 이 장면을 지속적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던 것 같다. 다행히 그 의무감은 나에게 충만함을 가져다주었고 힘든 순간순간 나는 여행에서 만났던 그 장면들을 오랜 시간 떠올리고 있다.


"내 고민 따위 자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와서 부딪히면 거품만 남기고 사라지지만 움직이고 쉴 새 없이 부딪혀 왔기에 우리가 '파도'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내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것이 아무 쓸모없는 거품만을 남기더라도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해"


'파도를 걷는 소년'이라는 영화를 알게 되어 본 적이 있다. 이주노동자 2세인 주인공이 서핑을 알게 되고 자신이 드디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면서 나타난 성장통을 그린 영화이다. 한국에 사는 조선족, 화교, 외국인 노동자 등을 폭력 범죄자로 다루기만 하는 다른 한국 영화들과 달리 자신을 한정 지으려고 하는 주변을 이겨내려는 주인공의 모습에 많은 공감을 받았다. 자신의 현실을 바다의 파도라고 생각하며 부서진 서핑보드를 테이핑 하여 파도 하나씩 하나씩 이겨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적셨다. 어렸을 적 나 역시 주변에서 "넌 안돼", "넌 할 수 없어", "넌 배경이 없잖아"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성장을 했기에 주인공의 모습이 과거의 나 같기도 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20대 마지막 지점에서 그림만 보면 이름을 바로 알 수 있는 유명 일본 작가를 그의 화실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 그때는 술을 참 좋아했지 - 그 작가분이 나에게 술을 따라 주며 했던 이야기는 내 인생 명언 중에 하나이다.


"너를 한정 지으려고 하는 것에 집착하지 마라.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면서 너의 인생은 시작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벗어나라"


나는 나에게 안된다고 하는 것들에게 벗어나면서부터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단주를 시작했을 때 '그게 가능해?'라는 눈빛과 말들이 있었지만 단주 시작 후 지금까지 나는 술을 생각(?)만 하고 살아가고 있다. - 그래.. 난 너를 너무 사랑했다. 하이네켄 -


벗어난다는 게 꼭 파도를 이겨나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래사장처럼 그대로 흡수하는 것도 방법이고 서핑처럼 파도를 흘려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자신에게 적절한 방법을 찾아보자. 나는 수영을 좀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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