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라는 말 안에는 그 자체로 어려움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버티고개역을 보면 알 수 있죠. 지하철 플랫폼에서 내리자마자 이어지는 긴 에스컬레이터에 한 번 놀라고, 출구로 나오자마자 이어지는 오르막길에 한 번 더 놀랍니다. 어디를 가든 이곳에서 우리는 고개라는 명사의 두 가지 함의를 모두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에스컬레이터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수준의 것이었어요. 손잡이를 잡지 않아서 넘어지기라도 하는 순간 수십 미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진심으로요. 여행용 캐리어를 갖고 버티고개역에 가실 분들은 정말 조심해야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전시에 방공호 목적으로 역을 개통한 건 아닐까 하는 상상도 곁들여봤습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방공호로 쓰기에 너무 적합한 형태의 공간이었으니까요. 평양 지하철이 무려 지하 100미터에 건설된 데에는 방공호를 겸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니까 수도권 지하철 역시 그렇지 않을까 충분히 추론해 볼 만하죠. 그래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수도권 지하철역은 어딘지 검색해봤습니다. 8호선 남한산성역으로 지하 56미터 깊이에 있다는군요. 아, 그러니까 버티고개 역이 1등이 아니었군요. 그럼 남한산성역은 도대체 얼마나 깊은 건지, 그보다 깊다는 평양의 지하철역은 대체 어느 정도인지 순간 아득해졌어요.
이 모든 생각을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했습니다. 타고 올라가는 데에만 몇 분은 족히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러고도 한 층을 계단으로 올라가고 나서야 개찰구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출구 밖으로 나오려면 계단을 또 올라가야 하고요. 이건 제 생각인데, 주변에 집을 구하실 직장인 분들은 잘 감안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버티고개역에서 도보로 5분’이라는 멘트에 속으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집에서 버티고개역까지의 거리가 5분이라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입구에서 플래폼으로 내려가는 데 족히 10분쯤 걸리니까요.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제가 사는 곳의 도시철도는 경전철이라 역사가 지상에 있습니다. 출근시간에 열차를 타려면 낑낑대며 계단을 올라 2층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야 해요. 가까스로 카드를 찍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는데 열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 울고 싶습니다. 그때마다 왜 1층에 개찰구를 만들지 않은 걸까 원망하곤 하죠. 반대편 노선은 안중에도 없이요.
제가 이곳에 산다면 그 참담한 기분을 매일 아침마다 느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아침잠이 많거든요. 지각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도착해 있을 때의 상태는 마치 탈수기에 들어갔다 나온 빨래와 같습니다. 그렇게 기진맥진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죠. 이 동네에 사시고, 버티고개 역을 출퇴근 시간마다 이용하시는 아침잠 많으신 분들, 존경스럽습니다. 네, 이 생각도 계단을 올라갈 때 했어요. 숨이 차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역사 밖으로 나오니 바로 아파트가 보였습니다. 산 중턱에 있어서인지 여타의 아파트보다 훨씬 거대하고 육중해 보였어요. 발레리 줄레조가 쓴 <아파트 공화국>에 나오는 저자의 짤막한 일화가 생각났어요. 한 번은 동료 도시계획가에게 서울의 5000분의 1 축적 지번 약도를 보여 주었더니 ‘한강변의 군사기지 규모는 정말 대단하군’이라 했다는 이야기 말이죠. 도시계획가가 군사기지 같다고 말한 아파트들은 사실 동부이촌동 단지이지만, 군사기지로서의 면모는 남산 자락의 아파트들이 더 강해 보입니다. 만약 이곳이 정말 군사기지였다면 한강과 남쪽의 벌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을 겁니다. 더 나아가 서울 시내 전체를 쉽게 통제할 수 있었겠죠. 하필 아파트의 창이 전부 남쪽을 향해 있어서 그런지 마치 한강을 겨누고 있는 총안구처럼 보였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남산의 아파트 단지가 중상주의 시절에 건설된 지중해의 요새처럼 느껴졌습니다.
대로를 따라 쭉 올라갔습니다. 도로 주변에 난 가로수와 녹지들 덕에 괜히 신이 났습니다. 몇 분 되지 않았는데 중구와 용산구의 경계가 나왔어요. 도로 표지판을 보니 이 길을 따라가면 북쪽으로는 장충동, 남쪽으로는 이태원과 한남대교 방면으로 빠지는 터널이 있었습니다. 새삼스럽게 남산은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생각하게 됐어요. 충무로도 이태원도 장충동도 버티고개도 모두 남산을 끼고 있으니까요. 대도시 복판에 이런 거대한 산이 있다는 건 여러모로 행운인 것 같습니다. 그저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쉴 틈을 주니까요.
그 차이가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느낀 건 20대 때 떠난 도쿄 여행에서였습니다. 롯폰기 힐즈에서 도쿄의 야경을 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 넓은 도쿄 땅에 언덕 하나 없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어딜 가든 산이 있는 한국의 지리적 감각에 익숙해서인지 그 차이가 새삼 놀라웠습니다. 관동 평야의 광대함에 놀라다가도 한편으로는 저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고된 마음을 달랠까 싶었습니다. 그 넓은 벌판이 전부 건물과 도로로 뒤덮여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어요. 큰 공원들이야 많지만 인위적인 녹지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것들이 분명 있으니까요. 그 차이를 단칼에 잘라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단답형보다는 서술형에 가까운 답이 나올 수밖에 없죠.
취업준비생 시절, 혼자 남산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남산 자락에서 서울 야경을 보기 위해서요. 면접에서 줄줄이 떨어지던 때였죠. 종로 비즈니스 타운의 불빛과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의 차들을 보고 있으니 순간 삶을 객관화해 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 한 명, 차 한 대 하나하나가 모두 혈관을 이동하는 적혈구처럼 느껴졌습니다. 산에 올라서면 그 아래의 개인들은 지극히 작은 존재로 보일 뿐입니다. 잘났든 못났든 각자가 자신임을 말해주는 그 유일무이함이란 결국 아주 미세한 차이로 갈리는 거죠.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요. 현실 세계에서 차지하는 개인의 크기란 그런 것이죠. 그런 생각이 들자 왠지 후련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는 롯데타워나 롯폰기 힐즈 같은 고층 건물에서 보는 야경과는 다른 맥락의 감상을 안겨줍니다. 건물의 창을 통해 바라보는 야경은 도시를 하나의 사진이나 그림으로 바라보게끔 하죠. 현실세계와 자신이 분리된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산에서 조망하는 풍경은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게 돕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가감없이 환기할 수 있도록 돕죠. 그런 의미에서 남산은 고마운 존재입니다. 남산이 없었다면 제가 세계를 다르게 인식할 일도, 마음을 기댈 일도, 영화 <최악의 하루>의 주인공 윤희(한예리 분)가 남산 숲길에서 춤을 추는 명장면도 볼 수 없었을 겁니다. 여러모로 고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로변에 나 있는 숲길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계단이 꽤 가파른데 크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이미 버티고개 역사에서 어느 정도 고생을 한 터라 적응이 됐나 봅니다. 얼만 가지 않았는데 이정표가 나왔습니다. 이대로 산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이태원 하얏트호텔까지 연결돼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갈 자신은 도저히 없어서 가장 가까운 루트를 보니, 약수역까지의 길이 나있었습니다. 1km 남짓한 거리인데 이 정도면 갈 수 있겠다 싶었죠. 대로에 차들이 쌩쌩 달리는데도 숲 안쪽으로 들어가니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10분쯤 올라가니 건물이 보였습니다. 올라서니 다른 풍경의 남산이 펼쳐졌어요.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구릉이 한눈에 들어왔죠. 조금 더 지나가니 내리막길이 시작됐고, 그 초입에 눈에 띄는 가게가 보였습니다. 문 앞 이젤을 보니 소금빵과 치즈케이크, 포카치아와 와인을 판다고 적혀있었어요. 테이블이 좁아 보였지만 동네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창이 나 일단 들어갔죠. 들어가자마자 진열대 안쪽에서 발효 중인 포카치아를 봤습니다. 발효 중인 포카치아를 본 건 처음이었어요. 그 지점에서부터 뭔가 내공이 느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미 만들어진 포카치아는 전부 팔리고 없었습니다. 소금빵도요. 해서 치즈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습니다. 치즈케이크를 보고 처음에는 ‘음, 치즈케이크라기보다는 그냥 치즈 같은 걸?’이라고 생각했는데, 맞았습니다. 맛도 질감도 케이크라기보다는 꾸덕하게 구워낸 치즈에 더 가까웠습니다. 왜 와인을 파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순간 아메리카노를 시킨 게 후회됐어요. 나름 궁합은 잘 맞았지만요. 이젤에 치즈케이크와 와인이 적혀 있었을 때 바로 둘을 묶어 생각했어야 했는데. 아직 그 정도 경지까지는 가지 못한 듯 합니다.
그래도 나른한 분위기의 가게에 앉아 치즈케이크를 먹으면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니 기분이 좋아졌어요. 산 안쪽의 고급 주택단지와 낡은 집들이 한 구도 안에 펼쳐졌습니다. 그 너머에는 약수동의 번화가와 북악산이 어렴풋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마치 고도에 따라 식생이 다르게 나오는 아열대 기후의 산 같이 느껴졌습니다. 한 곳은 국가의 핵심 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고, 다른 한 곳은 재벌들의 대저택 단지가 있으며, 또 다른 한 곳은 도시재생 구역으로 지정된 달동네가 있습니다. 모두가 동경하는 삶과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삶이 같은 산자락에 공존합니다. 그 모습이 타지에서 온 누군가에게 이채로운 광경일 수 있음이 얄궂습니다.
가게를 나와 약수역 방면으로 향했습니다. 언덕을 내려와 아까 창문을 통해서 본 곳을 바라보니 산을 탄 듯도 아닌 듯도 한 기분으로 고개를 내려왔습니다. 많은 곳을 둘러본 것도 아니건만, 왠지 머릿속에 남는 인상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디저트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허기가 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녁을 어디서 먹을지 고민하면서 동네를 벗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