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신랑 오면 줘요.
이 동네로 이사를 온 지는 이제 6개월째가 되어 간다. 10분만 걸어 나가면 바다가 펼쳐지는 이 동네는 그야말로 바닷마을이다. 바닷가로 나가면 꽤나 유명한 관광지들이 몰려 있지만, 막상 내가 사는 마을은 오래된 아파트와 잡다한 상점들로 복작거린다. 그런데 막상 식사를 하려고 나가보면 가볍고 건강하게 먹을 만한 식당이 많지가 않다. 오랜 회사생활로 제대로 된 식사 한 끼를 만들어본 적 없는 나는 이 동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면서도 막상 매 끼니 음식을 차려먹는 데에 익숙해지질 않는다.
집 바로 앞에 있는 한 식당은 이사를 온 날부터 눈여겨온 곳이긴 하다. 백반 뷔페 8,000원이라는 거대한 현수막이 걸려있는데, 길을 지나다닐 때면 항상 ‘Closed’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기에 그곳이 점심에만 1시간 정도 운영하는 곳인 줄은 알 도리가 없었다.
남편과 바다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도 식당은 언제나 그렇듯 ‘Closed’가 걸려 있었으나, 다른 날과 달리 식당 문이 열려 있고 그 앞에서 깡마르고 거먼 얼굴을 한 안경 낀 아저씨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계셨다. 호기심 앞에서 나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라 아저씨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 식당 운영하시는 건가요? 네 운영해요. 제가 여기 앞에 사는데 항상 문이 닫혀있길래 안 하시는 줄 알았어요. 저희는 오전 11:30부터 1시간 정도만 해요.
놀란 나와 남편은 엎드리면 코 닿을 데에 있는 백반 뷔페가 매일 점심만 잠깐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고, 나는 어느 평일 오전 11시 27분쯤 식당에 도착했다. 분명 문은 열려 있는데 불은 꺼져있고, 음식은 차려져 있는데, 사람은 없었다. 안쪽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식사 돼요~~ 아주머니는 말씀하셨다. 거대한 밥솥과 국솥, 그리고 학교 다닐 때 먹던 배식용 반찬통이 줄줄이 늘어져서 다들 한가득 음식을 담고 있었다. 아니, 얼마 전에 신혼부부가 여기 식당 하냐고 물어봤다 해서 우리는 운영한다고 했는데, 설마 이분이 그분이신가??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날 쳐다봤다. 맞아요. 저희가 물어봤어요. 나는 웃으며 화답했다. 아니, 근데 이거 다 리필도 되는 건가요? 오전 운동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탄단지가 훌륭하게 구성된 반찬을 보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며 물었다. 맞아요. 먹고 더 먹어요. 어느새 사장님은 주방에서 제육볶음이 한가득 담긴 냄비를 들고 오신다.
그다지 대식가가 아닌 나에게 뷔페는 언제나 손해인 곳이다. 그런데 그날은 온갖 야채와 나물이 집밥을 향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식탐을 자극했고, 어느새 큰 쟁반에는 온갖 반찬이 한가득 담겼다. 와 대박이다..대박이다.. 속으로 외치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국까지 알차게 있었다. 어느새 손님들이 하나둘씩 무리 지어 들어왔다. 대부분은 근처에서 공사를 하는 남성 인부들이었다. 식당은 십여 명의 인부들과 다소 이질적인 손님인 나로 채워진다. 오전 공사를 한창 끝내고 배고픈 속을 달래러 온 인부들은 시끌벅적 밥을 먹는다. 나는 조용히, 천천히, 그렇지만 몰입하여 음식을 먹는다. 속으로는 계속 탄성을 외치면서.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구성의 백반이 단돈 8천원이라니. 게다가 사장님 음식 솜씨가 심상치 않다. 일단 달지가 않아서 너무 좋다. 단 음식은 디저트에만 허용되는 나에게 반찬가게에서 파는 반찬이란 죄다 너무 달았는데 이곳 음식은 그렇지가 않다. 다만 조금 짜긴 하다. 그렇지만 반찬이 짠 것보다 단 것을 더 못 견디는 나에게는 반가운 곳이다.
오전 내내 땡볕에서 일하느라 허기진 인부들은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그들이 담은 반찬보다 내가 담은 반찬이 더 많은 것 같다. 천천히 음미하며 먹다 보니 어느새 빈 그릇이다. 계산대에는 까맣게 탄 얼굴의 남자가 서있다. 사장님의 아들인 것 같다. 8천원이요. 저기 혹시 여기 주말에도 문 여시나요? 아들은 엄마를 향해 묻는다. 엄마, 내일 문 여나? 연다.(경상도 사투리) 네 엽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돈을 지불하면서도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왔다.
바로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남편을 데리고 식당에 갔다. 남편은 여긴 가성비 식당이 아니라, 그냥 맛있는 식당이라고 했다. 사장님은 남편과 함께 식사하러 온 나를 뿌듯한 듯 쳐다보시며 계속 말을 거셨다. 알고 보니 이 식당은 인근 병원이나 회사에 점심 배달을 주로 하는 곳이었다. 식당을 찾는 주 고객들도 해당 공사 업체와 이 식당이 계약이 되어 있어서인 것 같다. 나는 사장님께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조미료가 많이 안 들어간 것 같아서 집밥 같고 너무 좋다고 했다.
그렇게 한번, 두 번, 점심마다 식당을 찾았던 나는 어느샌가 친구들을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가기도 했다. 서울에서 놀러 온 친구도 있었고, 이 지역에서 새로 사귄 친구도 있었다. 그때마다 사장님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아우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식사를 하시고.. 그러면서 어느 날은 내게 반찬이 남을 것 같으니 전화번호를 남기고 가라고 하셨다. 음식점에서 사장님이 반찬을 덤으로 주시겠다는 곳은 난생처음인지라 갑작스러워진 나는 눈이 커졌다. 커다란 메모지와 볼펜을 건네주시는 사장님께 홀리듯 번호를 적어드리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그날 오후 4시쯤 사장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는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잽싸게 식당에 갔다. 분홍색 비닐봉투 안에 비닐로 싼 국과 반찬들이 잔뜩 있었다. 제법 무거웠다. 마치 엄마나 이모가 바리바리 싸주는 반찬 같아서 가슴 한 켠이 찡해왔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걸 이분이 채워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고, 사장님은 눈까지 활짝 웃어주시며 에이 뭘~ 뭘~ 하셨다. 집에 와서 보니 반찬이 너무 많아 마침 집에 놀러 온 친구에게 반찬을 나눠줬다.
그렇게 나는 마치 잘 갖추어진 커뮤니티 시설이 있는 아파트에서 매 끼니를 제공해 주는 것처럼, 그 식당을 그렇게 이용하곤 했다. 사장님은 내 취향도 잽싸게 파악하셔서 국을 떠주실 땐 건더기만 떠주시는 걸 잊지 않으신다.
한 번은 직접 양봉해서 꿀을 파는 한 까페에 갔다가 식당 아주머니 생각이 나서 거기서 직접 양봉한 아카시아꿀을 선물로 사서 드렸다. 사장님은 소녀처럼 기뻐하셨다. 아들에게도 자랑하셨다. 이거 직접 양봉한 꿀이란다. 귀한 꿀이란다.
어찌 보면 사장님과 나는 진득하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사이인데, 이렇게 그냥 고마운 마음에 뭐라도 부응하고 싶어서 뭐라도 해드리고 싶은 걸 보면 인간이란 참 묘한 존재란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그냥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 주고,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유 없이 날 좋아해 주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싶은 마음은 그래서 내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올라오는 감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 준 사람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산이기도 하다.
아카시아 꿀을 선물로 드린 그날, 사장님은 내가 계산을 할 때 신문지에 바리바리 싼 커다랗고 납작한 통을 건네주셨다. “저녁에 신랑 오면 줘요.”
어쩌면 인생에서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어준 스쳐 지나간 그들의 호의를 더 많이 알아차릴 수 있을 때, 이유 없이 내게 무관심한 또 다른 이들에게, 심지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이유 없이 아낌없는 애정을 줄 수 있는 힘도 생겨나는 것 아닐까. 기꺼이 이유 없는 호의를 베푸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