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추하다 대표야
장문의 카톡을 대표가 확인한 것을 보고 작업실로 향해 대표의 컴퓨터를 정리했다. 비겁하게 카톡으로 당일 퇴사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하며 자책도 했었다. 왜 요즘 계속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대표가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무섭기도 했다. 이쯤되니까 대표가 정말 무서웠다. 어제 대표가 본인 머리를 계속 때리며 웅얼거리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혹시 작업실에 몰래카메라나 녹음기 같은 게 있지는 않을까하고 두려워하기도 했었다. 작업실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면 어떡하지 하며 남이 들으면 '오바하네'하겠지만 그때의 나는 진짜 정신적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아무튼 컴퓨터를 정리하는데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로 작업실 1층에 와있으니 카페에서 커피나 한잔 하자고 했다. 컴퓨터를 전달해야하니 우선은 알겠다고 하고 카페로 향했다. 어찌됐건 다른 사람이 있는 장소이니 또 자해를 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는 않겠지..
카페에서 만난 대표는 얼굴이 정말 어두웠다. 너무 어둡고 아파보여서 혹시 몸이 안좋으시냐고 물어봤다. 대표는 자리에 앉아서 한숨을 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고 나는 어찌됐건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 죄송하다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말했다.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미 내가 마음이 떠난 것 같으니 더이상 붙잡지 않겠다고 그동안 미안했다고 했다. 의외로 너무 차분하게 대화가 진행됐다.
"XX씨랑 싸우고 나서 계속 마음이 안좋더라고 그리고 나도 사실 같이 일하면서 너무 힘들었어"
"네 이해합니다. 저도 대표님 말씀에 잘 따르지 못해서 죄송했어요.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우리 와이프랑 같이 일하면 계속 일할래?"
"네?"
갑자기 뜬금없이 와이프 이야기를 하더니 본인 와이프는 보는 눈이 자기와 다르다며 디자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줄 수 있다고 앞으로 와이프에게 모든 컨펌을 받는 식으로 일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만둔다니까?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왜 어째서 대화가 잘되다가 이렇게 또 흘러왔는지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누가 들어도 우스운 소리였다. 회사 대표 사모님한테 작업물을 컨펌을 받으라고? 약사한테 디자인을 컨펌을 받으라고? 내가 정색을 하자 대표는 '그래 좀 웃기긴하다' 라고 답하더니 뜬금없이 이번엔
"그럼 나랑 유튜브할래?"
"네에?"
"나 유튜브 하고 싶은데 XX씨가 편집해줘"
"갑자기 왠 유튜브..?"
"XX씨 유튜브보니까 편집도 하던데 나랑 같이 그런 일을 하는 건 어때?"
왠일로 순순히 그만두라고 하나 했다. 도대체 매번 손이 느리고 일을 못한다는 직원을 왜 자꾸 붙잡고 늘어지는지.. 아니면 그동안 일했던 직원들에 비해 내가 고분고분 말을 잘듣는 편이었던 것일까? 희생양이 도망치는 걸 볼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 뒤로 몇분을 대표는 그냥 회장품 회사를 팔아버리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자고 그 사업에 함께하자고 떠들어댔다. 디자인 스튜디오를 하자는 둥, 내가 운영하고 있는 쇼핑몰을 함께 키워보자는 둥..말도 안되는 소리를 계속 해대서 나중에는 또 화를 내게 되었고 대표는 결국 또 내게 막말을 했다.
"XX씨는 앞뒤가 맞질 않아. 모순이 심해. 나는 참 걱정이된다. 다른 회사가도 이렇게 할까봐"
그만둔다는 직원의 장래를 걱정해주며 비꼬기 시작했다.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 이제 할말이 끝났으면 컴퓨터를 챙겨 가시라고 말하곤 일어났다. 그때 카페 문을 열고 나오는데 눈물이 났다. 내가 정말 대표가 말하는대로 정말 능력없는 사람 같았다. 디자인도 그림도 다 그만두고 싶었다. 그냥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XX씨 잠깐만! 컴퓨터 주말에 가져갈게"
대표는 걸어가는 나를 부르더니 컴퓨터를 주말에 챙겨가겠다고 말했다. 주말엔 내가 작업실에 없었고 어서 대표와 얽힌 것들을 처리하고 싶어 당장 가져가시리고 말했다. 그러나 대표는 뻔뻔스럽게 한다는 말이
"주말에 XX씨 작업실에서 제품 사진 좀 찍을게. 이미 약속해놓은거라 파토 못내. 그때 컴퓨터 같이 가져갈게"
란다.
정말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만둔 직원의 작업실에서 뻔뻔하게 사진을 찍는다니? 그것도 주인 없는 곳에서? 이 사람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걸까?
"안됩니다. 오늘 가져가세요"
더 이상 화낼 기운도 없었다.
그렇게 퇴사하고 3일 뒤가 월급날이었다. 이 회사는 15일이 월급이었는데 (이것도 웃기네. 15일을 깔고 가는게) 40일정도 일한 월급이 들어와야했다. 전날부터 마음이 매우 불안했는데 아니다 다를까 월급날 오전에 대표에게 전화가 계속 왔다. 전화와서 한다는 말이
"나 일러스트 과외시켜줘. 이대로면 어떤 디자이너가 와도 성에 안찰 것 같아. 그냥 나 스스로 하려고 그러니까 과외시켜줘"
라는 뻔뻔스러운 말과
"그래도 XX씨 일하는 스타일이 안맞아서 그만둔거잖아! 나는 사람 정말 좋지 않아?"
라는 넌씨눈 같은 말과
"나 상세페이지 새로 만든거 좀 봐줘!"
라는 정신나간 소리를 해댔다. 몇통의 전화를 계속 받아대다가 월급은 언제 넣어주실거냐고 물었다. '아 맞네! 오늘이 월급날이구나' 라는 어색한 대답을 하더니 그 뒤로 전화가 오질 않았다. 오후 5시가 지날때까지 월급이 들어오질 않았고 카톡을 남겼다. '월급 정산해달라고'
5분 뒤쯤 월급이 들어왔는데 금액이 이상했다. 예상했던 돈보다 적게 들어온 것이다. 대표에게 카톡을 남겼다. 금액이 이상하다고 대표는 월급명세서를 보내왔고 가만 명세서를 바라보니 세금을 13.3% 제외한 것이다. 뭔가 이상한대? 전화를 걸었다.
"명세서 봤는데 세금이 왜 13.3%가 나가있죠?"
"그게 그니까 그 세무사가 그러는데 부가세를 내야..아니.. 뭐지.. 그 취득세를 내야"
대표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부가세를 왜 때요? 취득세는 또 뭐에요?"
"뭐 경비처리를 해야한다고 했나? 그랬던거 같은데?" (심하게 당황한게 느껴짐)
"인건비를 왜 경비처리를 해요? 프리랜서는 그냥 3.3% 원천징수하고 주시면되요"
"그럼 안된대"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지금 거짓말하고 있구나. 내가 니 거짓말에 하루 이틀 당하니? 뭔 이런 양아치 같은 짓을 해? 부글부글 또 속이 끓기 시작했다.
"세무사 사무실 번호 알려주세요. 제가 통화할게요"
"에? 왜? 아냐 내가 말할게"
"아니에요. 대표님도 프리랜서 안 써보셔서 잘 모르시는 거 같은데 제가 통화할게요."
"아니야! 내가 전할게!"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이새끼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구나!'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이렇게 세금 떼인거 처음인데? 3.3%만 떼면 되는데? 이상하다?"
모르는 척 계속 대표에게 되묻자 대표는 계속 말을 더듬으며 그러게?뭐지?이상하다?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알아보고 연락주겠다고
잠시 뒤 나머지 금액이 입금되었다. '참 멍청한 사람이구나.. 10%로라도 덜주고 싶었나보구나..' 멍청하다못해 안쓰럽기까지 했다.
나머지 월급이 입금 됨을 확인하자마자 대표의 카톡과 전화를 모두 차단했다. 전남친 이후로 카톡과 전화를 차단해본 것이 얼마만인가! 유치하지만 그만 둔 이후로도 끊임없이 연락오는 이 미친 인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드디어 진짜 끝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작업실에서 일하고 퇴근하는데 퇴근길이 유독 더 밀렸다. 우회전 차선이 꽉막혀서 '왜 이렇게 못가지? 그냥 직진해야겠다' 싶어 차선을 변경하고, 앞지르는데 저 멀리 꽉 밀린 우회전 차선 제일 앞에 어떤 미친 인간이 싸이클을 타고 가고 있었다. 도로 옆에 번듯이 자전거 도로가 있는데!
"뭐야 저 또라이?"
쯧쯧 하며 혀를 차고 지나가는데 놀랍게도 대표였다.
"와"
입이 떡 벌어졌다. 문득 대표가 본인 사이클이 얼마나 비싼건지, 어떻게 구했는지 구구절절 자랑하던 일이 떠올랐다. 뒤에 저 밀린 차들 좀 봐라 미친 인간아...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고 엑셀을 밟았다.
끝까지 정말 추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