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웹디자이너의 고뇌
대표의 성차별 발언으로 정신이 혼미해질때 쯤, 퇴사의 욕구를 더욱 불지르는 이가 있었다. 바로 부사장이었다. 우리 회사는 두명의 부사장이 있었는데 한명은 경영 및 영업담당. 그리도 또 한명은 생산 담당이었다. 그 중 문제가 되는 부사장은 경영 및 영업담당의 부사장이었는데 어마어마한 라떼였다.
이 부사장의 경우 국내 렌탈 산업의 대표 기업 출신이었는데 본인의 말로는 '렌탈' 이라는 제도를 기업에 처음 도입한 이가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억대연봉은 물론, 지금도 다양한 기업에 고문 및 경영을 맡고 있어 굉장히 바쁜 사람임을 항시 강조했고 본인은 자수성가의 아이콘임을 늘 어필했다. 그래, 거기까지만 들었으면 대단하군 하고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부사장은 점심 식사 후 커피 타임에 늘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 요즘 젊은이들의 문제점이라던가, 본인 세대의 대단함이라던가 등의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했다.
대표적으로 '부동산' 문제에 엄청나게 예민함을 발산하였는데, 하루는 뜬금없이 너무 오른 집 값을 이야기하며 '무주택자'인 나의 의견을 물었다.
"집 사고싶은데 너무 올라서 살 수가 없네요. 로또나 되면 모를까"
당장 전세로 살고 있는 우리 집만해도 2년사이 2억이 올랐다. 전세 만기는 곧 코 앞이고 이사를 앞둬야하는 '무주택자'의 20대 기혼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저게 최선이었다. 부사장은 코웃음을 치며 그래서 집을 못사는 거라며 코웃음을 쳤다.
"나때는 말이야. 연봉 1800 받고 시작했어. 그리고 서울 아파트 2억짜리 사서 그 집을 10억에 팔았어. 요즘 사람들은 너무 끈기가 없고 노력을 안해. 로또 소리나 해대고 쯧쯧"
헉. 이런 발언을 사회에서 진짜 듣게 될 줄이야. 인터넷에서 밈으로만 돌던 '라떼는 말이야'를 실제로 듣게되나니!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아까의 이야기를 옆에서 가만히 듣던 부장님이 말했다.
"완전 기성세대 옹호자 아니에요? 지들이 집 값 다 올려놓고, 2억에 사서 10억에 팔았대. 그리고 30년전 연봉이 1800이면 많은거 아니야?"
나는 조용히 답했다.
"걍 그러려니 해요. 우리"
입사한 지 2주쯤 되었을 때 새로운 직원이 입사하였다. 그 분의 구인 공고는 [고객 응대 및 제품 안내를 위한 CS담당] 이었다. 그리고 CS경력이 꽤 되었던 이 분은 '온라인팀 팀장'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온라인팀이라고 해봤자 나와 새로오신 팀장님 꼴랑 둘이였지만 아무튼 우리는 같은 사무실, 옆자리에 자리하게 되었다. 아! 여기서도 황당한 일이 있었는데 팀장님의 입사 날, 소개를 받던 자리에서 부사장님이 내가 물었다.
"김대리 혹시 CS 담당 직원이 옆에 있으면 일하는데 방해될까? 전화 응대하면 시끄럽잖아"
잠깐 소음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당장 전화가 많이 오지도 않을 것 같았고, 평소에 이어폰을 끼고 있는 편이라 크게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당장은 괜찮을 것 같은데, 후에 CS 직원분들이 많이 오시면 제가 자리를 옮길게요."
"괜찮겠어? 그럼 당분간은 이어폰끼고 일해"
여기까지의 대화는 괜찮았다. 그런데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대표가 갑자기 끼어들더니 대뜸
"무슨 소리야? 바쁘면 같이 전화도 받고 그래야지!"
예? 웹디자이너가 고객 응대도 하라구요? 기획 업무에 이어 전화응대까지 하게 된 웹디자이너라니? 이럴거면 차라리 나를 온라인 총괄 팀장을 달아주라!
아무튼, 그렇게 팀장님과의 회사생활이 시작되었다. 팀장님은 성격도 참 좋으시고 우리 둘다 7살 딸을 키우고 있다는 공통점으로 금세 친해졌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참 나긋나긋하셨기 때문에 생각보다 전화 소음도 심하지 않았다. 문제는 고객 CS담당으로 입사한 팀장님이 입사 2주가 지날 때까지 그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데에서 오기 시작했다. 나 같은 경우도 제대로 된 제품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상세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계속 자료를 찾아보고 질문하고, 또 질문하면 교육을 가장한 잔소리를 들었기에 어느 정도 제품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팀장님은 고객이 무언가를 물어보면 정확한 답변은 커녕 질문도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셨다. 결국 그러면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전화를 넘겨받아 고객을 응대하거나 쪽지로 대신 답변을 적어 넘겨주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표님의 말대로 정말 전화응대까지 하게 된 것이다.
우리 회사의 제품은 '프린터 장비'였는데 프린터 중에서 '레이저 프린터'에 설치되는 장비였다. 나는 사실 입사 전, 프린터 종류에 잉크젯이 있고 레이저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또한 레이저 프린터에 다양한 부품 및 장비가 들어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내 돈으로 레이저 프린터를 사본 적도 없었다. 팀장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우리는 장비기 때문에 일반 개인 고객들보다 기업이나 회사에서 대량으로 구매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더욱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런 응대를 해야하는 팀장님에게 그 누구도 제품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부사장님은 항시 바빴고 대표님은 기본적인 교육만 대-충 하고 이정도면 됐지? 하는 스타일이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어느 날, 고객을 응대하던 팀장님이 견적서를 잘 못 보낸대서 시작되었다. (견적서를 왜 CS 담당인 팀장님이 작성해서 보내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웹디자이너가 전화응대까지 하고 있는 판이니 이해해보자) 팀장님이 잘 못 보낸 견적서를 대표가 뒤늦게 확인하고 우리를 소환했다. 왜 흑백으로 보내야되는 견적서에 컬러로 견적서를 보냈는지 묻는 질문에 팀장님은 우물쭈물 '컬러와 흑백의 견적 차이가 어떤건지 잘 모르겠다' 라고 대답하셨다. 사실이었다. 팀장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셨다. 그리고 제품 교육은 커녕 견적서 작성도 팀장님에게 넘긴 대표가 큰 소리를 칠 일이 아니었다. 대표는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이런 식이면 어떻게 할거냐고 성을 냈다. 그러더니 대뜸 '김대리 넌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었다.
"대표님 죄송한데 팀장님이 아직 제품 교육을 못받으셨어요. 전화상담도 어려워하셔서 우선 제품 교육 먼저 해주시는게 좋을 것 같아요."
내 대답에 대표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부사장은 당황한 말투로 말했다.
"맞네! 제품 교육도 아직 못시켜줬네. 오늘 우선 교육부터 받자고"
그런데 대표는 부사장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교육? 교육은 무슨 교육이야? 그때 내가 교육 시켜줬잖아! 그리고 공부를 해야지! 모르는 게 있음 본인이 찾아서 공부를 하는거야!"
공부? 무슨 공부? 우리 제품이 인터넷에 치면 나오는 제품인가? 본인이 개발해놓은 제품을 우리가 어떻게 찾아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대표가 말한 본인이 시켜줬다던 교육은 그냥 우리에게 제품 구성 품목을 설명한게 다였다. 그러니까 판매 제품의 세트 구성만 설명한게 다였다는 것이다. 대표는 저 말을 끝으로 쿵쾅거리며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부사장은 부랴부랴 팀장님에게 제품 교육을 시켰다.
30분쯤 지났을까? 대표가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와서 회의실 칠판 앞으로 다가갔다. 대뜸 보드마카를 들더니 '자! 이렇게 하자고!' 하곤 화이트 보드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전화 -> 견적서-> 끝]
대표는 저렇게 적어놓더니 아주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전화오면 견적서 보내드린다고 메일만 받어! 연락처랑! 그리고 끊어!"
팀장님과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잠시 마주보았다. 대표는 제품에 대해 잘모르니 성급히 대답하지말고 고객에게 견적서를 보내드릴게요. 라고 대답한 후 연락처만 받으라는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그리고 그 단순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했던 말 또하고 했던 말 또하며 2시간 가량을 떠들었다. 결국 팀장님은 부사장님의 제품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대표의 교육을 가장한 무한 반복 잔소리를 2시간 가량 들은 후에 퇴근하실 수 있었다. 그리고 팀장님은 다음 날 '웹디자이너'인 나에게 '비공식적인' 제품 교육을 받으셨다. 왜냐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이상의 제품교육은 없을 것이란 걸......
그런데 대표는 알까? 우리 고객들은 전화를 하자마자 '여기 어디어디 회사인데요~ 견적서 좀 보내주세요." 하지 않는다는 걸. 대부분 고객들은 세계최초로 출시 된 이 제품이 어느 부분에서 좋은 건 지, 비용절감은 얼마나 되는 지, 탄소배출은 얼마나 줄일 수 있는 지, 설치는 어떻게 하는건 지, A/S는 어떻게 진행되는 지 등을 궁금해한다는 걸. 그래서 우리가 전화상담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까?
그리고 우리에게 전화 온 그 누구도 견적서를 요청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