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by life barista

그 의미를 알고 나서 받았던 충격을 명인성은 여전히 가슴에 담고 있다.

명인성은 죽은 사람처럼 어둡다.

하철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밤늦도록 이어진 대화도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뾰족한 답을 주지 못했다.


“선생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우리나라가 이렇게 쉽게 두 동강 날 수 있을까요?


하철상이 천근 같은 입술을 연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이렇게 배우고 가르쳤어요.

경쟁은 공정하다,

공정한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우월하다,

우월한 사람이 지배하는 것이 정의롭다.

AI 사피엔스는 이런 사회에서 승자가 되려고 나노 송과선과 로봇 신체를 이식한 사람들입니다.

죽을 수도 있는 위험까지 감수하면서요.

그들에게 경쟁에서 진다는 건,

존재 자체가 열등하다는 의미예요.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존재 자체가 열등한 사람이라면 윤리적으로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명인성은 받아들일 수 없는 답을 억지로 말한다.


“나쁜 사람이라고 판단하겠죠. 윤리적으로 나쁜 사람은 악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인정하기 싫지만 논리적으로 그런 결과가 나옵니다.

AI 사피엔스가 보기엔,

경쟁에서 밀린 열등한 사람이

윤리적으로도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번 사건이 증명한 셈입니다.

사람이 먹는 물에 독을 넣으려면 악마 정도는 돼야 하니까요.”


명인성은 화가 났다.


“아니, 그동안 같이 살았던 사람들이잖아요.

일도 같이 했고,

밥도 같이 먹었고,

같은 노래도 듣고,

같은 영화도 보고,

같이 웃고,

같이 울던 사람들을 어떻게 한순간에 악마로 생각할 수 있죠?

물에 독을 넣었다는 그 주장부터 의심하고 확인해야 하는 게 순서 아닌가요?

아무 생각 없이 그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무장한 군인들을 호수로 보냈다는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선생님.”


심각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하철상이 답한다.


“파레시아 모임에서 한나 아렌트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 있죠.

수백만 유태인을 가스실에서 죽인 아이히만을 보고 한나는 깜짝 놀랐다고 해요.

아이히만이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요.

머리에 뿔도 없고 엉덩이에 꼬리도 없는,

동네 골목에서 언제든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가진 사람.

그가 아무 죄책감 없이 살인 가스 밸브를 열었단 사실을

한나는 믿기 어려웠던 거죠.

여기서 그녀가 주장한 개념이 악의 평범성이잖아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어떤 의미인지 기억납니까, 인성 씨?”


물론이다. 그 의미를 알고 나서 받았던 충격을 명인성은 여전히 가슴에 담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사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주장이나 명령이 사실인지, 옳은지, 가치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행동하는 것!

이번 사태도 악의 평범성이 범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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