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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barista Sep 16. 2021

회사원은 벌레로 변해서도 지각을 걱정한다

- 1번째 책, 카프카 『변신』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일어나, 늦겠어! 벌써 7시 30분이야!“ 

아내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뭐라고? 왜 이제 깨워! 미쳤어!“      

미쳤냐는 말에 아내는 순간 이성을 잃고 악을 쓴다.      

”미쳤냐고? 30분째 깨우고 있잖아! 아기 안고 달래면서, 당신 아침밥 차리면서, 종종걸음으로 내가 침대에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 줄 알아? 내가 매일 아침마다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데! 고맙단 말은 못 할망정, 미쳤냐고? 세상에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사람이 당신 혼자야? 아침형 인간이란 말도 못 들어봤어?“     


아침형 인간에 대한 아내의 찬사는 끝이 없다. ‘아침형 인간은 저녁형 인간보다 평균 수명이 길다’, ‘같은 80년을 살아도 일찍 일어난 만큼 아침형 인간이 저녁형 인간보다 오래 산 셈이다’, ‘아침형 인간은 저녁형 인간보다 혈관질환이나 암에 걸릴 위험이 낮다’, ‘아침형 인간은 저녁형 인간보다 자살 시도를 덜 하고, 성관계는 더 많이 갖는다’ 등등. 최대리는 그렇게 오래 살고 싶지 않았다. 요즘처럼 지친 날에는 그냥 편히 살다 편히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회사생활 7년 만에 최대리의 영혼과 몸은 먹다 남은 라면처럼 잔뜩 불어 터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침형 인간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아내의 목소리 높이와 무게로 봤을 때 최대리는 빨리 꼬리를 내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이유 여하를 따질 것도 없이 미쳤냐는 말은 너무나 큰 잘못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100% 반성 모드로 바꾸자니 남자 체면상 그럴 순 없었다. 결국 할 말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목소리 톤을 최대한 불쌍하게 고치면 아내의 마음을 누그러트리는데 효과적일 거라는 꼼수도 한몫했다. 한편 뇌의 다른 반쪽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어제 밀린 업무와 오늘 해야 할 업무 그리고 내일 예정된 업무까지 스케줄을 짰고 있었다. 최대리는 비몽사몽에도 아내에 대한 사과와 업무 스케줄까지 척척해 내는 자신이 순간 대견했다.     


”요즘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 그래. 이럴 땐 출퇴근 왕복 3시간이 정말 지옥 같아. 마을버스 잡으러 뛰어야지, 지하철 갈아타면 숨도 못 쉴 정도로 답답하지. 출근도 하기 전부터 몸과 마음이 파김치가 된다고. 너무 힘들어.“     


하긴 그럴 때도 됐다. 벌써 7년 아닌가! 턱없이 올라버린 아파트값에 부부는 일찌감치 서울을 포기했다. 신도시에 신혼집을 잡고 서울 입성을 다시 노리자, 매달 적금은 얼마씩하고, 부모님들 용돈은 당분간 양해를 구하고, 주말엔 좋은 아파트 매물이 나오면 보러 다니자고 의기투합했다. 늘어난 출퇴근 시간을 걱정하는 아내에겐 아침형 인간으로 거듭나 자기계발 시간으로 쓰면 오히려 더 좋지 않겠냐고 너스레 떤 것도 사실 최대리였다.     


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부르르 떨면서 얼굴을 감싸고 털썩 주저앉았다. 앉으면서 손에 있던 주걱을 바닥에 던졌다.      


”너만 힘들어? 나는 안 힘들어? 말끝마다 내가 잘못했대. 게다가 이젠 미쳤냐고? 그래 미쳤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아내는 운다. 서럽게.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 미쳤는지, 최대리는 순간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해!“     


최대리는 끄응 아픈 소리를 내며 두 팔로 베개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이미 늦은 일이다. 아, 조금만 참을걸. 조금만 일찍 일어날걸. 마지막 말은 하지 말걸. 무슨 부귀영화를 본다고 이 고생이람.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최대리는 이 상황에서도 지각이 걱정됐다. 전산 기록에 남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라던 선배들의 충고가 번쩍 생각났다. 정성적 평가야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결근이나 지각처럼 시스템에 남는 근태 현황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최대리는 비록 육체는 출근하지만, 자신의 영혼은 집에 남아 아내를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이런 상황에서 허겁지겁 출근하는 것도 모두 가족을 위한 것이라며 그럴듯한 명분도 챙겼다.


아내가 정성껏 준비한 된장찌개 냄새가 거실에 가득하다. 최대리는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단 말만 남긴 채 뛰기 시작한다. 7시 48분 출발하는 지하철을 놓치면 지각 확정이다. 마을버스가 제때 와야 하는데. 뛸 때마다 느낀다. 근육은 부족하고 지방은 넘실댄다. 헬스클럽 회원권이 생각났다. 입주할 때부터 있었던 헬스클럽이 망했다. 반도 못 쓴 회원권을 날릴 상황이다. 신장개업 전단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했더니, ”회원님, 일단 한번 와 보세요!“라는 활기찬 목소리가 들린다. 그 대답을 들은 게 벌써 두 달 전이다. 한 번도 못 갔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역까지는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다. 다른 신경 쓸 거 없이 내달리기만 하면 된다. 발이 여럿 달린 벌레처럼 잘 달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 한단 생각에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다. 거기서도 뛴다. 나만 뛰는 게 아니다. 다들 같이 뛴다. 쿵쿵 소리가 공사장에서 쇠말뚝 박는 수준이다. 에스컬레이터가 자주 고장 나는 이유가 있다. 뛰지 말라는 안내문이 허수아비처럼 무능하다.     


꼭 이런다. 개찰구가 보이면 지하철은 항상 우리 역에 거의 도착 직전인 것이다. 구원열차는 언제나 나에게 무심하다. 전광판은 이제 막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표시한다. 전력 질주하면 간신히 탈 수 있을지 어떨지 간당간당하다. 이 와중에 교통요금 후불카드가 개찰구에서 한 번 걸린다. 삑삑거리더니 2초 후 길을 터 준다. 2초가 2년 같다. 다시 계단. 걸음아 나 살려라. 잠이 덜 깬 근육은 오른발 왼발도 헷갈린다. 허벅지는 금방 후들거리고 무릎은 시리다. “출입문이 닫힙니다. 안전문이 닫힙니다.” 아슬아슬하게 다이빙 승차에 성공한다. 성공을 꾸짖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무리한 승차를 하면 위험하단다. 이 안내방송은 무리한 승차를 한 후엔 더욱 또렷하게 들린다.          



지옥철 풍경  

     

승차 성공의 기쁨도 잠시. 주변 눈초리가 대단하다. 눈으로 하는 욕과 말로 하는 욕의 위력이 비슷하다. 최대한 모른 척하지만, 나 때문에 뒤로 밀린 아저씨는 어깨를 거칠게 휘두른다. “거참, 그만 좀 밀어요!” 아저씨 뒤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소리 지르신다. “내가 밀고 싶어서 밀어요? 막 밀고 들어오니까 나도 할 수 없이 밀린 거잖아요!” 최대한 모른 척한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안 들려야만 한다.      


다음 정거장 문이 열린다. 내렸다 다시 탄다. 내리는 사람들 탓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재승차가 만만치 않은 상황. 승차 대기 중인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다시 타기 위해 초조하게 기다리며 한 걸음씩 전진하다가 출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몸을 싹 돌린다. 엉덩이로 밀고 들어가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살살 민다. 어림없다. 이젠 힘을 주고 밀어붙인다. 조금씩 가능성이 보인다. 몸 전체가 가까스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가방이 낄까 걱정돼 문이 닫히는 걸 끝까지 지켜본다. 가방은 안전하다. 다행이다.      


가방의 안전을 확인한 머리를 들어본다. 어라? 들리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지하철 문에 제대로 끼였다. 지하철은 덜컹 소리를 내며 달린다. 손잡이를 잡지 못했지만 몸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기도 하거니와, 문에 낀 머리털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가방을 본다. 다음 정거장. 문이 열리고 머리가 다시 자유를 얻는다. 몇 가닥 빠졌다. 그래도 고개를 드니 세상 편하다. 목을 뒤로 젖혀보고 옆으로도 돌려본다. 기능을 확인하는 것이다. 다행히 잘 돌아간다. 아내가 이 모습을 본다면 모든 걸 용서하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지옥과 관계가 깊다. 우선 나라의 별명은 헬조선이다. 헬조선 사람들은 지하철을 지옥철이라고 부른다. 지옥불보다 뜨거운 게 한국의 교육열이다. 학교 가지 않는 아들 걱정에 엄마는 지옥철 틈바구니에서도 전화기를 놓지 않는다. 개인적인 통화라 듣지 않아야 하지만, 워낙 가까워 어쩔 수 없다.

      

 "아들, 일어났어?"

 ("...")

 "그건, 정당한 이유가 아니야. 어서 학교 가야지!"

 ("...")

 "그렇게 자주 학교를 빠지면 어떻게?"

 ("...")

 "엄마가 미안해......“     


지옥철 문이 열린다. 미안한 엄마는 다시 임금노동자가 되어 종종걸음으로 사라진다. 아들의 정당한 이유를 애써 지우면서 말이다. 최대리는 궁금했다. 아들이 말한 학교를 빠질만한 정당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들은 왜 학교에 자주 빠질까? 엄마는 왜 미안할까? 두 사람 사이에는 요즘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엄마는 멀어져 갔지만, 엿들은 몇몇 단어들이 이야기로 자라 이어폰을 통해 들렸다.      


이야기는 이렇다.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일진들이 오늘까지 마련해 오라고 한 돈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얼마 전 아버지 장례를 치른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할 순 없지만 결석할 만한 정당한 이유이긴 하다. 자기 신체와 존엄성을 폭력으로부터 구하는 것만큼 정당한 이유가 또 어디 있나. 아버지는 트럭 운전을 하셨다. 야간 운전이 계속됐다. 아버지는 깜빡하시다가 꾸벅하셨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셨다. 경찰은 그걸 졸음운전이라고 했고, 중대 범죄라고 덧붙였다.      


이제 엄마의 이야기. 남편이 죽은 뒤 나는 청소 일을 시작했다. 아들이 50만 원짜리 겨울 패딩을 사달라고 한다. 자기 빼고 다 입었다고 했다. 학교에 가기 싫단다. 남편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세상이 지옥으로 변했다. 사고처리도 보험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어제는 계단 청소를 하다가 미끄러졌다. 넘어지면서 허리를 삐끗했는데 몸 전체가 영 불편하다.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 요령을 부린다며 작업반장이 혀를 찬다. 학원비가 제일 큰 걱정이다. 아들만큼은 번듯한 직업을 가져야 할 텐데. 그때까지 내가 뒷바라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이번 달엔 꼭 학원에 보내야 하는데, 미안하다.     


최대리는 한국 사회를 이렇게 상상하고 있었다. 엄마와 아들의 통화 너머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삶은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본디 최대리의 심보가 뒤틀려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드라마나 뉴스를 통해 만들어진 나쁜 이미지가 겹쳐 보인 결과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최대리는 자신의 삶도, 이웃들의 삶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행복은커녕,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한심할 지경이었다. 오늘 아침 집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에 다시 한숨이 났다.      


최대리는 자못 심각해졌다. 간신히 올라탄 지하철은 지금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걸까? 이 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를 향해 뛰고 있는 걸까? 울고 있는 아내를 남겨둔 채, 미친 듯 달려 출근하는 내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그는 나에게 묻지 않았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리느냐고. 최대리는 갈아탄 지하철 한쪽 구석에 박혀 어제 배송된 『변신』을 가방에서 꺼냈다.          



벌레 DNA 보다 센 회사원 DNA     


그레고르는 늘 오른쪽으로 누워 잔다. 최대리도 그렇다. 자고 일어나면 오른쪽 어깨가 단단히 뭉쳐있는 이유도 한쪽으로 자기 때문이다. 최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주물렀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 정도 안마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그레고르는 지금 진짜 갑충으로 변해 있으니 말이다. 그는 하루아침에 장갑차처럼 딱딱한 둥근 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무슨 고된 직업을 나는 택했단 말인가! 날이면 날마다 여행 중이라니. (…) 기차의 접속에 대한 걱정, 불규칙적이고 나쁜 식사, 자꾸 바뀌는 바람에 결코 지속되지도, 결코 정들지도 못하는 인간관계 등. 마귀나 와서 다 쓸어가라지!      


벌레로 변했지만 회사원 DNA는 고스란히 남았는지, 그레고르는 여전히 회사와 밥벌이에 대해 화를 참을 수 없다. 회사생활이 얼마나 뭐 같으면, 자신이 벌레로 변한 황당한 망상까지 들겠는가. 그는 회사원들이 멍청해지는 이유를 이렇게 잘라 설명한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니까 (…) 사람이 아주 멍청해지지. 사람은 잠을 잘 자야 해.  

    

최대리는 맞는 말이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레고리는 모든 걸 다 잊고 출근을 준비한다. 벌레로 변한 현실이 아직 실감 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타야 할 기차 출발시간과 사장의 호된 꾸지람을 떠올리며 절망한다. 지각을 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재빨리 오늘 지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럴듯한 이유를 고민해본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핑계가 생각났다. ‘몸이 아프다고 하면 어떨까?’ 0.1초도 안 돼 이 핑계는 기각된다. 왜냐하면 그레고르는 5년 동안 한 번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대리는 슬펐다. 벌레로 변해서까지 지각과 사장님의 꾸지람을 걱정하는 회사원. 자신이 그러한 회사원이라는 사실에 우울해졌다. 회사원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걸까? 최대리는 자신의 팔다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제 그레고르는 지금 상황이 꿈이 아닌 것을 받아들인다. 말을 할 때마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찍찍거리는 벌레 소리가 섞여 나오기 때문이다. 굳이 자기 뺨을 세게 때리지 않더라도 너무 아파서 더 이상 꿈이라고 우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벌레로 변신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럴 리 없다. 절대 그럴 리 없다!           



팀장도 벌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일곱 시 십오 분이 되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침대를 완전히 떠나야 한다. 여하간 그때까지는 일어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매장에서 내가 어찌 된 셈인지 물어보러 누구든 오겠지, 매장이 일곱 시 전에 여니까.    

 

그레고르의 예상은 적중했다. 회사에서 누군가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지배인이 직접 왔다. 참으로 야박한 노릇이다. ‘어찌하여 그레고르만은 조금만 지각해도 형편없이 큰 혐의를 받는 회사에 고용되어 일하도록 그 운명이 정해졌단 말인가?’   

   

그레고르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요즘이) 장사가 썩 잘되지 않는 철이기는 하지, 그 점은 우리도 인정하지. 그러나 장사가 안되는 철이라는 건 도무지 있지도 않거니와, 있어서도 안 된단 말이세.’ 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지껄이는 지배인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어떤 날, 지금 나처럼 벌레가 되는 건 아닐까?  

    

최대리는 팀장 얼굴이 떠올랐다. 팀장은 회사에서 유명한 마이크로매니저(micromanager)다. 마이크로매니저란 모든 업무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관리자를 말한다. 마이크로매니저인 팀장이 벌레로 변했다고 생각하니 꽤 잘 어울려 보였다. 마이크로매니저와 일하는 팀원들은 사소한 일까지 신경 써야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재량권이 거의 없다고 느낀다. 따라서 스스로 일을 하지 못하고 늘 팀장 눈치를 살피게 된다. 특히, 지각 같은 대형사고가 생기면 그날은 불안 장애를 각오해야 한다.     


카프카는 지배인도 벌레로 변할 수 있는가라는 그레고르의 엉뚱한 생각에 대해, ‘그럴 수도 있는 가능성은 사실 시인해야 했다.’라고 썼다. 최대리는 이쯤에서 작가가 궁금해졌다. 그 이름하여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는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지역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 지역은 여러 민족과 언어가 뒤섞여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과 전쟁이 있어 온 분쟁지역이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으로 자랐다. 불안정한 정치 환경 속에서 언어와 민족이 서로 다르다는 건 카프카의 자아정체성 확립에 큰 어려움을 줬을 것이다.     


이런 성장배경으로 인해 카프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묵직한 질문을 가슴에 숨긴 채, 법률사무소와 보험회사 외판원으로 일한 카프카. 기계처럼 반복되고 오로지 돈만 좇는 월급쟁이 생활은 그를 더더욱 인간과 삶에 관한 깊은 질문으로 안내했을 것이다. 카프카의 질문은 곧 최대리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나는 왜 지금 여기 있는가?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어야만 하는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내가 벌레와 다를 게 무엇인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 그렇다면 나는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인간답게 사는 건 또 뭐지?’     


최대리의 결론은 이렇다. 인간 역시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도 벌레와 다를 바 없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고자 한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나답게 살고자 한다. 옳은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찾아 헤맨다. 옳지 않고, 좋지 않고, 아름답지 않는 삶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삶을 살아선 안 된다고 서로를 격려하고 교육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진선미(眞善美)는 없다. 이런 건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진선미를 꿈꾸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허무하고 부조리하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벌레로 변신시키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수많은 존재들 중에 왜 하필 벌레일까? 가족들을 위해 성실하고 소박하게 살아온 착하디착한 우리 그레고르를 왜 벌레로 변신시켰을까? 벌레의 등과 다리를 하고서도 회사에 지각할까 봐 걱정하는 천상 회사원인 우리 그레고르는 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까? 최대리는 카프카가 자신을 벌레처럼 보는 것 같아 많이 언짢았다.     


하지만 최대리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인간을 벌레에 비유한 건 카프카만이 아니다. 괴테도 『파우스트』에서 인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신들을 닮지 않았다! 벌레와 닮았다. 어디서나 인간들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 어쩌다 하나쯤 재수 놓은 놈이 존재했다는 것, (…) 그걸 알려고 수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최대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벌레를 생각해 봤다. 내가 아는 벌레 중 가장 악질은 바퀴벌레다. 내가 바퀴벌레를 가장 악질로 치는 이유는 아내 때문이다. 아내는 바퀴벌레라는 소리만 들어도 혼수상태가 된다. 바퀴벌레가 최고 악질인 까닭은 바퀴벌레 자체가 악질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악질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그렇게 정한 것이다.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퀴벌레는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된다. 바퀴벌레에게 이 상황을 전해줄 수 있다면, 뭐라고 할까? 단박에 이렇게 묻지 않을까?    

 

“네가 뭔데? 인간이 뭔데? 나랑 뭐가 다른데?”          



인간은 벌레와 뭐가 다른가     


이제 최대리가 답할 차례다. 인간은 벌레와 뭐가 다른가?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바퀴벌레를 그토록 처참하게 학살하는가? 인간은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 적어도 바퀴벌레 앞에선 자랑할 일이 아니다. 우린 아직도 바퀴벌레를 전멸시키지 못하고 있다. 생존에 관한 한 바퀴벌레가 인간보다 더 뛰어난 건 아닐까.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바퀴벌레도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이나 더듬이를 통해 적절하게 의사소통한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고 민주적으로 살아간다? 벨기에 브뤼셀자유대학 호세 할로이 박사팀은 바퀴벌레도 사회성을 갖고 행동하며 협력과 경쟁을 한다는 연구결과를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바 있다. 사람은 불을 사용한다? 바퀴벌레는 생존하는데 불 따윈 필요 없다. 질긴 생명력으로는 지구 최강이다. 3억 5천만 년 이상 진화하면서 오늘날까지 버텨왔다.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바퀴벌레를 죽일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다. 우리가 바퀴벌레보다 힘이 더 세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그대로 우리 삶에 적용해보자. 힘센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최대리는 다시 카프카의 문제의식을 되씹어 보았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카프카는 인간을 벌레로 변신시켰을 때 벌어지는 사건들을 상상했을 것이다. 아무리 회사생활에 찌든 사람이라도 사태가 이 정도라면 인간다움이 뭔지 심각하게 질문하게 되지 않을까.          



겉모습이냐존재 목적이냐     


우리가 ‘무엇이 되었다’라고 말할 때, 그 판단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겉모습으로만 결정되는 것일까? 자전거를 개조해 자동차처럼 모양을 고쳤지만, 자동차처럼 달릴 수 없다면 그걸 자동차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책상을 의자로 고쳤지만 아무도 앉을 수 없다면, 의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자동차는 운전자가 원하는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의자는 사람이 편히 앉기 위한 목적이 있다. 그렇다. 무엇이 되었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왜 존재하는지, 그 존재 목적을 따져 판단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 목적을 갖는가? 벌레는 어떤 존재 목적을 갖는가? 소설 『변신』에서 이 질문은 중요하다. 만약 인간만의 독특한 존재 목적이 없다면, 겉모습이 비록 벌레로 변신했어도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목적 없는 인간의 거죽이, 역시 목적 없는 벌레의 거죽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러한 결론은 가정부가 그레고르의 최후를 가리키는 단어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러니까 말씀입니다. 옆방의 저 물건을 어떻게 치워버려야 할는지,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 놓으시라 이겁니다. 벌써 다 해결됐으니까요.      


벌레로 죽은 그레고르는 물건이 되었다. 누군가에 의해 처리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혹시 그레고르는 인간의 모습으로 살 때도 누군가에 의해 처리되어야만 하는 존재였던 건 아닐까? 회사원이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지시받고 처리되어야 하는 존재 아니었나? 최대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에게 물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은 몸의 형태로 결정되는가? 아니면 인간만의 고유한 존재 목적에 의해 결정되는가? 그러한 존재 목적이 없다면, 우리가 벌레와 다른 점은 정녕 무엇인가? 나라는 회사원은 누군가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무엇은 아닌가?’ 출근길, 아무런 목적 없이 지각을 면하기 위해 달리고, 지옥철에 몸이 끼어있던 최대리는 이제 불안하고 불투명한 질문들 사이에 마음이 끼어있다. 설상가상으로 더 어려운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벌레로 변한다면 아내는 어떻게 할까?     


최대리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에 가장 크게 놀랐다. 사랑하는 아들이요, 생활비를 버는 실질적인 가장이요, 동생의 학비까지 마련하는 착한 오빠인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에 가족들 모두는 어쩔 줄 몰랐다. 인간이 죽음 등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보통 5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 그것이다. 그레고르의 가족들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처음에는 아들과 오빠가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것이 현실로 점차 굳어지자 격한 분노와 비통에 빠진다.      


하지만 부모는 당장 생계가 걱정이다. 하숙으로 먹고사는 집에 괴물을 그대로 둘 순 없다. 방금도 묵고 있던 외국인 손님들이 환불을 요구하며 한바탕 소란을 벌였다. 그레고르의 동생은 동생대로, 착하고 고맙기만 했던 오빠는 추억에만 머물길 바랐다. 자신은 아직 꽃다운 나이고,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다. 사실 벌레로 변한 오빠는 오빠가 아니라 그냥 벌레일 뿐이다. 벌레는 벌레처럼 다뤄져야 한다. 가족들은 이렇게 타협하면서 우울해졌고, 우울했지만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들었다.     


결국 그레고르는 벌레의 모습으로 죽었다. 그레고르는 가정부의 말대로 ‘물건’이 되어, 잘 처리되었다. 가족들은 잠시 우울했던 감정에서 벗어나 그레고르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출발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최대리는 내가 벌레로 변한다면 아내는 나를 어떻게 할까 궁금했다. 그 반대로, 아내가 벌레로 변한다면, 나는? 나아가, 사랑스런 아들이 벌레로 변한다면 우리 부부는 과연 어떻게 할까? 대답하기 쉽지 않았다. 고민해보니 그레고르의 가족들이 한 행동이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처럼 할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이 벌레로 변한다는 문학적 상상은 그야말로 상상일 뿐이다. 그러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독였지만, 최대리는 자기 자신과 아내 그리고 가족의 의미에 대해 지금까지 해 보지 못한 질문을 했고, 답을 구하기 위해 골몰했다. 그 질문들은 안 그래도 엉성하기만 했던 자신의 자아관과 가치관에 구멍을 숭숭 냈다.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자 최대리는 살짝 짜증이 났다. 넥타이 탓으로 돌리면서 사납게 풀어버렸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올려 본 하늘은 아름다웠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던 최대리 눈에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보였다. 최대리와 아내 그리고 아들은 아직 벌레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최대리는 아내에게 전화했다. 기분은 좀 어떠냐며 아침에는 미안했다며 그리고 사랑한다고도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라는 질문에 정답이 있을까. 정답이 있건 없건, 함께 살고 있는 가족과 같이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최대리는 벌레로 변하기 전에 조금 더 사랑하고 싶어졌다. 『변신』을 읽어내면서 만들어진 불안한 질문들 속에서 최대리는 신기하게도 삶의 방향감각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삶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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