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랏, 세르제, 사이드
내가 만난 이 사람은 검은 중심원 곁에 연두색도 하늘색도 아닌 색의 홍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귀밑 아래 정도 내려오는 브라운 계열의 금발을 가지고 있었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서 위로 들어내면 까끌까끌한 아랫 머리가 보이는데, 자주간 귓등에 머리카락을 꽂아 넘겨서 귓 쪽 머리카락에는 늘 반원 모양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볼은 상기되면 자주간 광대 쪽에 토돌 토돌 한 옅은 붉은 반점을 남겼고.
‘조금은 쑥스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하루는 좁은 복도에서 터키 친구들과 짧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대화에 방해가 될까 봐서인지 190의 거구로 머뭇머뭇거리느라 지나가지 못했고, 내가 거실에 나와 있으면 내 테이블 맞은편이나 옆 자리에 앉기가 뭐해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었는데, 이런 모습이 되려 내 눈에 띄었었다.
결국은 이어폰 한쪽씩을 나누어 끼고 음악을 들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사실 그때 이 사람은 ‘나와 친해지고 싶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쑥스러워한 게 전략이라면 좋은 전략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얄팍한 나는 현지인이 이방인에게 베푸는 친절에 쉽게 익숙해져 버렸고, 벌써 그 친절에 익숙해진 지 한 달하고도 열흘이 넘었다. 응답해줄 대상은 없지만 ‘나 그냥 지금처럼 이렇게 오래간 살면 안 돼?’라고 묻고 싶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고.
몰도바에서 이 친구를 5시 즈음 숙소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배고픈데 마트와 환전소 혹시 어디 있는지 아냐?’는 질문에 그는 ‘너 여기 몰도바인 거 까먹었어? 다 닫았지.’하고는 ‘너 토마토 스파게티 싫어하는 거 아니면 나 요리할 건데 좀 나눠 먹을 의향 있니?’하더니 스파게티를 대접해주었고, 호숫가 주변을 산책시켜주었다. ㅡ떠돌이 생활에 잠깐 지칠 때쯤이어서 그런지ㅡ 스스로가 ‘착한 주인을 만난 방견(放犬)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이드는 ‘스위스는 정말 싫지만, 정비공으로 일하는 자기 인생은 너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했다. ‘4명이나 되는 남자 형제는 너무 싫지만, 정비소의 동료들은 너무 좋다.’했고. 그리고 내가 배 중심 부터 힘주어 온 힘을 다해 웃는 것을 ㅡ손가락으로 본인 배꼽을 가리켜가며ㅡ 신기해했다.
헤어지는 날엔 사이드가 물었다. ‘너는 왜 예술 전공 안 했어? 너 쉴 때마다 그림 그리고, 글 쓰잖아. 그리고 다른 사람 눈동자만 그리지 말고, 네 눈, 그림으로 1년마다 기록해 두는 건 어때? 너 눈도 예쁜데. 아 그리고 이왕 나 그려줄 거면, 최고로 못생기게 그려줘.’
이 말 이후, 머쓱하지만 처음으로 내 눈을 그려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