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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대책 중년 부부, 백수가 되었다_일단 놀아!

2025년 7월 4일.

백수가 되었다.

동료들의 배웅을 받으며 한껏 아쉬운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온 뒤 부리나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드디어 퇴사다. 아아... 진짜 길고 고단했다. 오늘이 오기까지."

"그래, 축하해. 오늘 며칠이지? 맞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이잖아. 아주 기념일 다운 기념일이구만. 이제 진짜 홀가분하게 자유를 누려!"


남편 목소리 너머 시끌시끌한 배경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보다 두어 달 먼저 백수의 길로 들어선 남편은 이미 친구들과 이른 저녁식사 중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백수 부부가 되었다. 나는 마흔다섯, 남편은 쉰다섯. 회사에서 투명인간으로 사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는 이 애매한 나이에 우리는 둘 다 과감하게 '자발적 백수'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누가 보면 인생 2막을 꽤나 견고하게 설계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중년부부의 쿨한 모습 같겠지만, 사실 우리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전문 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니 프리랜서라는 그럴듯한 이름도 붙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모아놓은 돈? 있을 리가.


그런데도 우리는 그냥, 일단, 백수가 되기로 했다. 그간 수많은 번민 속에서 사직서를 몇 번이고 쓰고 찢는 고비를 겪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착실하게 각각 20년, 30년 넘게 일해온 우리는 서로 다른 이유지만 비슷한 시기에 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나 좀 쉴 테니 당신은 가계를 위해 조금 더 견뎌주겠어?" 따위의 이야기는 서로 하지 않았다. 그건 부부로서의 의무나 책임감보다 한 사회인으로서 겪고 있을 고충이 더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직할 자리를, 이후의 스텝을 미리 만들어두기엔 많이 지쳐 있었다. 닥친 현실은 쓰고 매웠다. 그동안 마구 욱여넣었던 사회생활 짬밥까지 목구멍을 기어올라오게 할 만큼.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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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전화 통화를 끝내고 익숙한 퇴근길에 올랐다. 수국이 만발한 여의도공원을 가로지르는데 후욱, 뜨거운 열기가 솟았다. 오후 6시가 넘었는데도 햇볕은 여전히 맹렬하게 등짝을 후려갈겼다.


"어쩌려고 그 좋은 직장을 때려치웠어, 어쩌려고!"


20년 전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본가 집에 내려갔을 때, 현관문 앞에서 등짝을 내리치던 엄마의 매운 손과 닮았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여의도에 있는 회사를 관뒀었구나. 뭐, 그때는 힘든 사정을 들어줄 생각도 없던 엄마에게 서운하고 아팠지만 이번엔 아프지 않다. 배짱이 생긴 걸까. 그나마 둘이라서 의지가 좀 되는 걸지도.


암튼 이렇게 무대책으로 백수생활에 돌입한 우리 부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브런치는 그 기록이다.


"여보, 내 코가 석 자지만, 당신 코 석 자까지 합치면 무려 '여섯 자짜리 콧물'이야! 뭔 일을 내도 낼 수 있지 않겠니? 그동안 쓰고 매운 거 삼키느라 고생 많았다. 대책은 없지만 일단 좀 쉬고 놀아보자, 싸우지 말고!"


"축하해! 사실 당신 퇴사가 너무 늦었어. 일단 여기저기 앓는 소리내는 몸도 마음도 빨리 나아야 한다. 그래야 나 취직하기 전에 홋카이도 '펜타곤(오각형)' 배낭여행 다녀오지! 며칠 전에 얘기한 것처럼 한 달 가는거다,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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