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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퇴사 뒤엔 꼭 이직이야?_가만히 쓸어주고픈 등짝

지인들 만나러 서울 간 남편. 분명 8시 38분 열차를 타고 내려온다고 했는데 연락이 없다. 늘 귀가할 때 미리 연락을 하는 사람인데 열차 시간이 다 되도록 감감무소식. 불안하다.


8시 36분, 전화가 왔다. 살짝 업된 목소리로 늘어놓는 설명을 요약한 즉슨, '식당 시계가 시간을 잘못 알려줘서 기차역으로 출발할 시간을 놓쳤다'는 것. 그래서 '식당으로 다시 들어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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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친절하게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왔다. 보낸 시간은 8시 40분,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20시 39분. 이때부터 콧방귀가 연속발사되기 시작했다. 아니, 기차 탈 사람이 바늘시계를 보고 움직인다고? 손에서 안 내려놓는 스마트폰은 어쩌고? 그냥 술 좀 더 마시다 갈게 하면 될 것을. 나 그렇게 빡빡한 사람 아닌 거 알면서.


결국 남편은 10시 기차를 타겠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자들. 평소 남편의 주사 패턴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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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주사의 특징을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1. 안 취한 척 애쓰나 오타 작렬

첫 문자는 오타 수정에 성공했으나, 마지막 문자는 그마저도 오타다. 녁, 녀는 '녜' 겠지.

2. 초 단문

단문 수준을 넘어 단어 하나씩 보내는 수준.

3. 노래 가사 뺨치는 사랑고백

진짜 그동안 보낸 문자 합치면 러브송 메들리 만들 수 있을 정도.

남편은 술 취하면 감정의 요동이 격해지는 편이라 속엣것을 드러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요즘 진짜 속마음을 짐작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어제는 문자들 중에 '그만둘래'가 눈에 들어왔다. 뭘 그만둔다는 걸까. 문맥상으론 사랑하는 걸 관둔다는 것 같지만 뒷문장과 연결이 안 된다. 회사는 이미 그만뒀는데, 그럼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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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궁금했던 게 아침에 보내온 문자로 풀렸다.


구직이었구나.


사실 남편이 옮겨가고 싶어하는 자리가 몇 개 있었는데, 채용완료 소식들이 연달아 들리면서 많이 낙심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도 해맑게 잘 지낸다 했더니 속 시끄러운 날들이었구나.


일단 놀자고 했지만, 남편은 일하는 걸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즐겁게 일한다. 하고 싶은 게 명확하고, 성취감도 크다. 그 분야에서 전문가로서의 자부심도 크고 그래서 꽤 인정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 즐거움과 만족감으로 30년 가까운 시간을 그닥 쉬는 기간도 없이 살아왔으니 지금 이 '무소속'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게 분명 쉽지 않을 터. 거기다 와이프까지 집에서 쉬고 있으니 24시간 종일 같이 있으면서 스트레스가 배가되는 건 아닐까. 어제의 미움은 좀 누그러들고 짠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종일 침대에 늘어붙어 자고 있는 저 등짝도 가만히 쓸어주고 싶을 만큼.


"남편아, 퇴사 당시를 떠올려봐. 퇴사의 목적이 이직은 아니었잖아. 늘 얘기하듯이,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어. 만약 그게 바로 할 수 없는 거라면 조금 돌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이직이 쉽지 않은 나이가 됐지만, 쉼표 하나 정도는 찍어줘도 될 타이밍이야. 마음 단디 먹어라, 남편!"


"주위 사람도 당신도 얘기해주듯 난 어디든 쓰임새가 있다고 자신하고 있어. 다만, 하고 싶은 일을 가고 싶은 자리에서 할 수 있길 바라는 건데. 그저 난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잖아? 한 번 두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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