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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르 Mar 02. 2018

6_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한강의 <채색주의자>는 총 221페이지다. 마지막 장을 넘겼다. 나는 그 책을 다 읽은걸까?


책을 읽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일이다. 작년 여름 맨부커 상을 받은 그 책을 읽었을 때를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새벽 안개에 에워쌓인 것처럼 한동안 헤어나올 수 없었다.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는 그녀만의 감각적인 문장들이 나의 잠들어 있던 감각들을 깨워서, 그 깨어난 감각들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 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나는 취향이 맞는 영화나 소설을 만나면 감정이입이 잘 되는 편이다. 가끔은 숨쉬기가 버거워질만큼.감정을 진정시키고 그 책을 찬찬히 독해해 내는 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나중에 포스팅하겠지만 나는 그 책을 가시에 찔린 채 가시로 찌르는 한 여자의 이야기로 읽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사랑이라 착각하며 서로 상처를 주는 한국사회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든다. 그녀가 왜 고기를 거부했는지, 그녀만이 피해자인지,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그것들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다고 쉽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계를 조립하는 것처럼 마지막 나사를 조였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텅 빈 길을 걷거나 커피를 한 잔 마시거나 창문 너머를 바라보면서 혼자 소설 속의 시공간을 재체험하고 등장 인물이 되어 사건을 다시 맞닥들여 볼 때 비로소 얻어진다. 여러모로 감정이입과 시간이라는 품이 드는 일이다.



<채식주의자>를 다 읽은 일요일 오후. 동네 공원을 한 참 산책한 뒤에야 나는 그 책을 나만의 관점으로 독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채식주의자>를 읽었다고.


비문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책장은 넘어가지만 활자가 머릿속에 이해를 새기지 못한다면 그 책을 읽지 않은 사람과 나 사이의 차이점은 전혀 없다. 칸트를 읽었지만 그의 말을 이해한 뒤 설명할 수 없다면 나는 그 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


책에는 저마다의 메세지가 담겨있는데 가장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책읽기는 바위를 깎아 석상을 만드는 일과 비슷한 것 같다. 여기에서 바위는 책이고 석상은 메세지다. 책 속에 쓰인 무수히 많은 활자들을 깎아내다 보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세지가 나타난다.


그 세부적인 과정은 이렇게 진행된다. 책을 읽고 나면 내 앞에 바위 하나가 준비된다. 품을 들여 사유할 대상이 생기는 단계다.


이제 망치를 들고 바위를 깎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밑줄 쳤던 부분을 위주로 보거나 챕터별로 줄거리를 요약해 보거나 인상깊은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으로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러본다. 바위는 그 종류에 따라 소설처럼 비교적 깎기 쉬운 것도 있고 철학이나 과학처럼 무거운 것도 있다.


물론 깎다보면 힘이 버겁기도 하고 무엇보다 귀찮을 때가 많다. 하지만 일단 시작했으니 계속 깎아 본다. 무엇보다 바위를 얻는 일, 즉 책을 끝까지 다 읽는 데까지 이미 품을 들였으니까 말이다.


만약 품을 제대로 들였다면 시간이 흐른 뒤 머릿 속에 형태를 갖춘 석상 하나가 놓여 있을 것이다. 뿌듯한 순간. 책을 읽었다,라고 말 할 수 있을 때는 바로 이 순간이다.


고백하자면 나에게는 아직 끝내지 못한 책과 영화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 포스팅에서는 책을 다루지만 영화읽기도 마찬가지다.) 나는 분명 마지막 장면까지 다 보았지만 그것들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물에 젖은 편지처럼 해독되지 못한 채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몇몇은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했고 몇몇은 흥미가 당기지 않아 독해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과 책을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의 시차. 때로는 지루하면서도 때로는 황홀한 그 시간의 간격을 즐기는 것이 독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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