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42 댓글 2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재벌은 아닌데요, 약혼식은 했습니다

MZ세대가 X세대로부터 배운 형식의 의미

by 다움 Mar 20. 2025

대망의 가족회의 날, 그녀는 약속한 대로 열린 마음으로 가족들을 마주했어요.

'지난번처럼 안된다, 결사반대다 이야기하면 그냥 다 엎고 나간다' 하는 불씨는 마음 저 깊숙이에 숨겨두고서 말이죠.

아빠도 꽤나 노력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던 지난번과 달리 담담하고 온화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는 게 보였거든요.


조용히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을 느낀 그녀가 먼저 운을 띄웠습니다.

"엄마아빠는 내가 오빠랑 같이 사는 게 걱정된다고 했잖아.

어떤 부분이 걱정되는데..?"

지난 아침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은 분명 어떤 부분이 걱정되는지 이야기를 하셨을 거예요.

하지만 격한 감정으로 언성을 높이며 이야기했기에 그녀의 귀에는 그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았을 테고요.

이번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온전히 들어보자는 다짐을 하며 건넨 질문이었지요.



그 질문에 아빠가 담담하면서도 진솔하게 답했습니다.

"너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형식적일 뿐 의미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분명 그 형식이 있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효과가 있어.

관계에 어느 정도 울타리가 되어주는 측면이 있.

서로가 미워지고 잠시 싫어질 때도 그 울타리가 서로를 묶어주는 역할을 해.

소중한 관계를 잃지 않게 한 번 보호해 주는 거지.

결혼해서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동거라는 형태로 시작함으로 인해 그 소중한 관계를 잃을 수 있다는 걸 아빠는 걱정하는 거야."


아빠의 그 답은 늘 '형식보다는 실질이 중요해!'하고 외쳐온 그녀가 들어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측면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측면에서 아빠가 걱정했던 거라면 그녀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빠, 그렇게 말해주니까 너무 이해가 가.

아빠가 어떤 부분에서 걱정을 하는지도 충분히 공감되고.

동거라는 형태가 결혼보다 조금 더 가볍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결혼해서 잘 살 수 있는 관계가 쉽게 깨질까 봐 걱정하는 거잖아.


하지만 아빠, 나는 동거를 다른 사람들이 결혼을 결정하는 수준으로 진지하게 생각해서 결정했어.

우리의 동거는 결혼을 전제로 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야.

동거를 한다고 해서 결혼한 사이보다 우리의 관계를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럼에도 살아보니 도저히 함께 사는 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면 헤어지겠지만, 그건 이혼만큼 어려운 결정일 거야.

너무 사랑하지만 함께 살기에 어려운 사이도 있다고 생각해.

만약 우리가 그런 사이라면 결혼했다 이혼하는 것보다 동거하다 이별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녀의 대답을 듣고 아빠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침묵을 하다 이야기를 이어갔어요.

"그래, 네가 가벼운 마음으로 동거를 하려는 건 아닌 건 알겠어.

하지만 동거를 하다 이별을 하게 된다면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여자가 손해 보는 부분이 많아.

솔직하게 아빠는 우리 딸이 그 사실로 인해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어려움이 생길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네가 동거를 했다는 사실이 너한테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어."


그 이야기를 듣고 엄마도 이야기를 덧붙였지요.

"맞아, 딸아. 사실 엄마도 부분이 걱정돼..

나는 내 딸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 이야기를 듣고 그녀는 실감했습니다.

부모님과 그녀가 정말 다른 세대로서 살고 있다는 것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의 부모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전혀 몰랐던 그녀였어요.

'엄마아빠 세대의 생각은 이렇구나. 다른 사람들도 아니 우리 부모님이 이런 생각을 하신다면 이건 정말 세대가 공통적으로 가진 생각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더욱 자신이 있었습니다.

"엄마아빠,

내가 동거했다는 걸 약점이나 불리한 사실로 보는 사람, 집안이면 안 엮이고 싶어.

물론 내가 사귀는 사람들마다 동거를 했다면 관계를 조금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내가 동거 사실을 이야기할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동거를 시작했고, 어떤 이유로 끝을 내게 되었는지 다 이야기를 할 텐데, 그 이야기를 듣고도 그렇게 본다면 내가 먼저 노땡큐야.

오히려 그런 사람을 거를 수 있어서 좋을 수도 있겠어!"



그녀의 말이 끝난 후 부모님의 표정에는 '아이고 맞아 이게 내 딸이지.' 하는 생각이 그대로 보였어요.

하지만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녀는 결국 동거를 시작할 거란 것을요.

아빠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난 여전히 동거를 찬성하진 않아.

하지만 네가 말했듯 너의 인생이잖니.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도 네가 하겠다고 하면 그래.. 존중은 할 거다."


존중.. 이 존중이라는 단어가 아빠의 입에서 나오기까지 부모님이 얼마나 많은 대화를 하고 생각을 했을지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단어를 듣고 참 고마웠어요.

하지만 나의 인생인데 왜 가족들의 의견을 들어야 하냐고 소리쳤던 그녀사실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는 가족들이 그녀의 선택을 지지해 주기를, 응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엄마아빠.. 내가 여태 어떻게 살아왔는지 엄마 아빠가 제일 잘 알잖아.

늘 알아서 잘하는 큰 딸이었잖아.

나 여태 한 번도 아무 생각 없이 쉽게 선택한 적 없어.

이번 선택도 그래. 충분히 고심하고 내린 선택이고 최선을 다할 거야.

큰 딸.. 믿지?"


울 생각은 없었지만 이 말을 하다 보니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요.

그 눈물은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하기에, 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반대해 왔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와닿아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그녀의 선택에 대해 부모님은 '존중'이라는 결론을 내주셨어요.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 그와 동거할 준비를 하면 되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무언가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존중하기로 한 부모님을 위해, 그녀도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존중하고 싶었달까요.


그녀는 가족회의에서 오간 대화를 곰곰이 곱씹었지요.

그러다 아이디어가 생각났어요.

동거라는 결론을 유지하면서도 과정 속에서 부모님을 존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

그건 바로 '약혼식'이었습니다.


형식이 가지는 울타리로써의 기능을 이야기했던 아빠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생각해 낸 아이디어였지요.

그녀는 바로 그에게 이 생각을 공유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이미 쿨하게 '동거? 그래, 네가 고심해서 한 선택이라면 해라.'하고 이야기해 주신 상황이었기에, 그의 가족들이 약혼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지 확인이 필요했어요.


그는 그녀와 가족들이 겪은 상황, 나눈 대화를 알고 있었기에, 약혼식이 그녀가 마음이 편해지는 방향이라면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난 약혼식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살면서 서로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우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소중한 순간이 되지 않을까?

우리 가족들에게는 내가 이 특별한 의미를 잘 전해볼게.

집에 가서 부모님께 한 번 제안드려봐.

양가 모두 좋다고 하시면 우리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간소하게 약혼식 하자."



그의 대답을 듣고 그녀는 다시 한번 확신했어요.

'내가 그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 이유가 바로 이 남자가 이렇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그의 대답 덕분에 그녀는 그와의 동거에 더욱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 하며 이야기를 꺼냈어요.

"내가 엄마아빠가 해준 이야기들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형식이 주는 의미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동거를 하기 전에 가족들끼리 모여서 약혼식을 하면 어떨까 해요.

양가가 함께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동거를 시작한다는 걸 알리고, 약속하는 거지!"


그 이야기에 엄마는 반색을 하며 답했습니다.

"어머~~ 너무 좋은 생각이다!

안 그래도 부모님도 안 만나보고 우리 딸과 함께 살게 한다는 게 아주 불안했었는데!

난 아주 찬성이야 찬성~~!"


아빠는 늘 그랬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하고 답하셨고요.

그 짧은 대답만으로도 그녀는 느낄 수 있었어요.

'약혼식은 부모님을 존중하고 싶은 나의 마음이라는 걸 아빠는 알고 있구나' 하는 것을요.



감사하게도 그의 가족들 또한 약혼식을 소중한 시간으로 여겨주셨습니다.

아마도 그가 이 마음을, 취지를 잘 전했기 때문이겠죠.

덕분에 우리는 약혼식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거라는 우리 관계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여, 우리는 이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기겠다는 약속.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그 약속을 했습니다.

레스토랑의 작은 룸을 빌려 약혼식을 했어요.


브런치 글 이미지 1

형식이 가지는 의미를 알게 된 그녀는 식의 구성을 꽤나 제대로 준비했지요.

가족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 함께 식사를 하고 - 그와 그녀가 커플링을 교환하고 - 가족들 앞에서 이 관계를 더욱 진지하게, 소중하게 생각하겠다는 약속을 한 후 - 케익까지 커팅!

어때요? 제법 형식을 갖추었죠? :)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약혼식은 참 잘한 선택이었어요.

우리의 관계 그리고 가족들을 존중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으니까요.

집안에서 동거를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하고 있는 꿀팁이기도 합니다ㅎㅎ


 


To be continued..

[Next → : 약혼식까지 하며 시작한 동거, 우리는 평소에 잘 맞으니까 같이 살아도 잘 맞을 줄 알았는데..]


이전 04화 난 살아봐야 평생 살 수 있어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