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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아.. 엉엉

양쏘공: 양말이 쏘아 올린 작은 공

by 다움 Mar 25. 2025

약혼식 날로부터 3주쯤 지났을 때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우리의 집으로 이사했어요.

가족들로부터 동거에 대한 지지를 얻는 그 과정도 꽤나 어려웠지만, 동거를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함께 살기 위해 준비하는 모든 과정은 새롭고 낯설었요.

우리가 성인이라는 것이 제법 실감 나는 과정이었달까요.

집을 알아보고, 협상을 하고, 대출을 받고, 예상치 못한 변수로 시기를 조율하고, 가전가구를 고르고..

그녀에게는 '내가 참 온실 속 화초였구나'를, 그에게는 '그녀는 정말 J이구나'를 실감하게 한 경험이었지요.


그래도 함께라서 그 모든 과정을 해낼 수 있었요.

그 과정 속에서 때로는 재미를 찾고 때로는 의미를 찾으며 우리는 서로를 기특해했답니다.

그렇게 수많은 과정을 거쳐 그와 그녀의 동거는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을 꾸미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어요.

평소에도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하는 그와 그녀에게 언제든 편하게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점이었고요.

무엇보다 행복한 건 집을 나서서 데이트를 가야만 볼 수 있었던 그가, 그녀가 자고 일어나면 내 옆에 있다는 것이었죠.


그렇게 함께 산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하고 감사한 나날들이었습니다.

처음 한 달은 아주 긴 여행을 같이 온 것 같았어요.

2박 3일, 3박 4일.. 그렇게 여행을 다녀도 늘 아쉬웠었는데 이렇게 원 없이 붙어있을 수 있다니!

그러다 두 달, 세 달이 되니 이제 점점 여행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서로의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질문으로, 그다음엔 제안으로, 그 이후엔 의견으로, 그러다 결국 지적으로..

형태를 바꾸어가며 그 거슬리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지요.

 

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사실 쌍방이라기보다는 일방에 가까웠습니다.

그녀가 그에게 질문으로, 제안으로, 의견으로, 지적으로 형태를 바꾸어가며 잔소리를 했거든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우리는 평소에 잘 맞으니까 같이 살아도 잘 맞을 줄 알았는데.. 아닌가?'


그녀는 열정적인 잔소리꾼이었어요.

같은 이야기를 아주 여러 번 할 수 있는 그런 열정을 가진 잔소리꾼이요.

그녀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면 결국 그가 바뀔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복되는 잔소리들로 바뀌지 않았어요.

이제는 어떤 인간도 타인을 잔소리로 바꿀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 당시의 그녀는 그것이 가능하다 생각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그녀는 계속 말해도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좌절스러웠어요.



그녀를 그토록 좌절하게 한 그의 모습은 바로 '바닥에 양말을 벗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양말을 바닥 아무 데나 벗어놓는 건 유튜브 영상들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어요.

그 영상 속의 웃기는 일이 그녀의 일상에 일어나니 더 이상 하나도 웃기지 않았죠.


"오빠, 양말은 왜 여기에 벗어두는 거야? 혹시 다시 신을 거야?"

부드럽게 질문으로,


"자기야, 양말을 벗으면 바로 빨래통에 넣어보면 어떨까?"

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제안으로,


"양말을 바닥에 벗어두고 오빠가 빨래통에 넣지 않으면 결국 내가 넣게 되는 거잖아. 하루 종일 외출하고 벗어놓은 다른 사람의 양말을 만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 좀 더 신경 써주면 좋겠어."

납득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의견으로,


"양말.. 또 바닥에 있네? 벗으면 바로 빨래통에 넣기로 했잖아!!!"

강한 지적으로 잔소리를 이어갔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다 다섯 번쯤 되었을 때 그녀는 폭발했습니다.


"대체 왜!!!! 계속 양말을 바닥에 벗어놓는 거야.

이렇게 벗어 놓으면 누가 치우라고?!

벗어놓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



그렇게 폭발했을 때 사실 그녀는 아주 불만에 가득 차 있는 상태였어요.

그녀와 그의 정리와 청결에 대한 기준이 아주 달랐기 때문이죠.


그는 빨래들을 바닥에 좀 쌓아두었다가 한 번에 빨래통에 넣어도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몇 달 동안 그녀와 함께 살면서 집이 정돈되지 않았다, 더럽다고 느낀 날이 하나도 없었고요.


반면에 그녀는 집이 정돈되지 않아 어지럽고 더럽다고 느끼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그 집을 어떻게 정돈되고 깨끗한 상태로 만들 수 있는지 방법은 잘 몰랐어요.

그동안 가족들과 함께 살며 대부분 엄마가 집안의 정리와 청소를 해주셨기에, <정돈되고 깨끗한 집>이라는 완성된 상태의 기준은 있지만 그 상태를 어떻게 만드는지 how to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죠.


답답했던 그녀는 울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아... 엉엉엉

이렇게 양말로 부딪치는데 우리가 어떻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


그녀의 생각이 부정의 극단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감정이 격해질 때면 최악을 상상하는 그녀를 아는 그는 그녀를 달래며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아냐.. 안 그럴 거야. 우리 행복하게 살 거야.

내가 잘할게. 그렇게 생각하지 마."



감정이 그렇게 빵 폭발하고 내려온 후에는 감정의 영역은 줄어들고 이성의 영역이 넓어지기 시작하는 게 그녀가 살아온 패턴.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매우 이성적으로 바라보았어요.


그러자 그녀가 폭발했던 원인들이 보였습니다.

그와 그녀의 정리와 청결에 대한 기준이 아주 다르다는 것이 1차 원인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그녀의 기준에 맞출 의사가 충분히 있다고 표현했어요.

대신 그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 구체적인 액션의 형태로 알려주면 최대한 따르겠다 말했습니다.

양말을 양말통에 넣는 것처럼 잘 고쳐지지 않는 익숙한 습관은 오래 걸리겠지만 계속 노력하겠다는 말도 덧붙였고요.


사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여기에 있었어요.

<정돈되고 깨끗한 집>이라는 완성된 상태의 기준은 있지만, 그 상태를 어떻게 만드는지 방법은 모른다는 것.

그래서 그녀는 열심히 그 how to에 대한 학습을 했습니다.

정리와 청소에 대한 글, 영상을 열심히 찾아보며 자신만의 how to를 정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정한 how to를 기반으로 그에게 구체적인 액션을 지시했어요.

그는 그 지시에 기꺼이, 아주 적극적으로 응했습니다.

그녀가 알려준 방법으로 설거지를 하고, 그녀가 전해준 유튜브 링크를 보며 화장실 청소를 했어요.

(혹시나 오해하실까 살짝 주절주절 더해보자면 그녀는 지시만 하고 그가 다한 건 아닙니다ㅋㅋㅋ)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어요.

우리만의 기준과 방법을 정해가면서요.


그렇게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해결해가다 보니 양말은 정말 별 거 아닌 일이었어요.

평생 그의 양말을 빨래통에 넣는 것을 상상해 보니 그리 괴로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이왕 하는 거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니 그가 바닥에 벗어놓은 양말이 매일 다른 모양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양말이 마치 아트 같다고 생각도 들었어요.

한 때는 양말 아티스트라는 별명도 지어주었다니까요.

가끔은 그의 양말 옆에 함께 양말을 벗어두고 작품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그녀도 아티스트 데뷔!!

그 양말 작품을 전시하는 인스타 계정도 만들었답니다 :D


그 덕분인지 그의 양말 전시는 빈도가 줄어갔어요.

양말이 바닥에 없는 날이면 그녀는 괜히 서운하기도 했다는 후문이..


설령 그가 매번 바닥에 양말을 벗어놓는다 해도 그녀는 즐겁게 양말을 빨래통에 가져다 놓을 거예요.

그 양말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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