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한없이 가볍고 가벼운
Aug 03. 2023
복수를 부탁해!
몹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편협한 시각에서 쓴 글입니다만.
2005년 입사하고 18년이 지났다. 아가씨었던 내가 엄마가 될 만큼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철이 없는 나는 평소 나이먹음을 잊고 산다. 그런 내가 세월이 정말 많이 흘렀구나 느끼게 된 것은 조직문화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바뀐 것을 최근 실감하기 때문이다. 절대 막내에서 벗어날 것 같지 않았는데 MZ들이 이 조직에도 몰려오면서 그들의 문화가 주류가 되어버렸다. 분명 내가 박힌 돌인데 굴러온 돌에 맞아 잘게 쪼개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금. 라떼시절을 거품을 빼고 기억나는 사실 몇 가지를 기록으로 남겨본다. 언젠가 사료가 될 수도 있을 테니.
2005년에는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근무 중까지는 아니지만 퇴근 시간 이후에는 사무실에서 간간히 야근 중에 담배를 피우시는 상사가 있었다. 전에는 사무실에 재떨이가 있고 담배를 피우며 열받으면 그걸 던지는 분도 있었다지만 내게도 그 정도 일들은 전설이었다. 아 결재판을 던지는 분들은 있었고 요것은 당시 결재판을 주어오신 분께 당시 생생히 들은 얘기이므로 실제 발생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술자리를 얘기 안 할 수 없다. 야근이 수도 없이 많던 시절, 과장님은 5시쯤 오더를 잔뜩 내려준다. 머리가 아프다. 집에 언제 가나. 오더를 잔뜩 주고는 미안한 과장님은 야근하니 밥을 먹고 하라고 한다. 입맛도 없고요 아까 시키신 일 해야죠 라고 말하고프지만 왕벌처럼 입속에서 웅얼 거릴 뿐이다. 저녁만 먹고 가시면 좋으련만 반주도 하신다. 본인이야 오더는 다 끝났고 집에 가셔도 딱히 할 일이 없으시지만 우리는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쩌라는 것인가. 결국 과장님의 따뜻한 배려로 저녁 먹고 반주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11시~12시까지 일하고 집에 갔다가 과장님 오시기 전. 최소 8시 20분까지는 출근을 하는 쳇바퀴 생활이 지속된다. 집에서 정말 잠만 자고 온다. 회사에서 주무시는 분들도 간간히 계셨다.
과장님 점심은 서무가 챙긴다. 수석계라면 국장님 점심도 동시 다발적으로 챙겨야 한다. 매일매일 어디서 누구와 먹을지는 어제는 누구와 뭘 드셨는지 어제 술자리가 있었던 건 아닌지, 사전 예약이 필요한 곳은 아닌지 등 여러 가지를 고민해야하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도 중요한, 세상 피곤한 일이었다.
왜 그랬냐 묻는다면 그땐 다 그랬다. 조직은 지금보다 더 경직되어 있었고 이직은 드물고 나의 승진은 상사에게 달려있으니 말이다. 한 선배님이 과장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 너를 잘되게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앞길을 막을 수는 있다는 말을 들었다는 얘기에 적잖게 받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좋으신 분도 많았고 존경하는 분도 많이 만났지만 저 말이 이리 깊이 박힌 것은 실제로 충분히 그런 일이 가능할 만한 당시의 분위기와 수직적인 구조 때문일테다.
육아휴직을 한 삼 년 하고 돌아왔더니 갑질이 화두가 되어있었다. 쓸데없는 의전을 없애고 사생활을 중요시하며 후배들을 존중하라는 의도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갑질신고라는 시스템은 윗사람뿐 아니라 아랫직원에게도 권력(?)을 쥐어준 모양새다. 그러나 피라미드구조의 조직에서 중간에 자리 잡은 내 경력정도의 직원은 힘이 없다. 난감하다. 점심때만 되면 과장님은 안중에 없이 또래들과 발랄하게 샐러드를 먹으러 나가버린 서무와 그게 못마땅한 과장님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후배들에게 강요하는 갑질을 할 수는 없으므로 아기서무시절 하던 점심 챙기기 의전 비슷한 것은 십수 년째 내 몫이다.
MZ들도 그렇다. 서로 돕는 조직생활에서 같이 해야 하는 업무들은 당연히 참여해야 하는 것인데 부르지 않으면 스스로 하지 않는다. 선배들이 출장동선을 짜고 서류를 챙기는데 혼자서 인터넷을 보고 있다. 계속 이리하다간 걔를 미워할 거 같아 이리 와서 이거 같이 하지 않으련 하면 또 맑은 눈으로 와서 일을 하긴 한다. 기왕 할 거 말하기 전에 미리 하면 안 되겠니? 왜 눈치를 안 보는 것이니. 악의가 없고 착한 것 같긴 한데 절대 나서서 하는 법은 없고 자진해서 돕는 일도 없다.
그들을 보다 보니 우리 선배님들도 우리 세대가 못마땅했을까 궁금해지긴 한다. 한 번은 대놓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에이 너흰 잘했어 "라고 하지만 아닌 게 아닌 거 같은 느낌. 아직 고정도 눈치는 살아있다.
386세대라 하던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세대. 군부정권에 대항하여 이념을 위해 맹렬히 싸우던 기존 세대들은 우릴 X세대라 불렀다.
배꼽티를 입으면 기부니가 좋다던 X세대. 귀한 수입 과일 오렌지를 들고 압구정동에서 놀고 술을 먹던 게 우리 세대란다. 난 대학 때 IMF라고 명명되는 외환위기를 겪었고 그렇게 놀고 먹을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으나 한 가지 분명했던 건 그 시절에 민주주의 같은 이념얘기는 촌스러운 것이었고 내 취업이 제일 큰 이슈인 , 이전 세대에 비해 분명 개인적인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니 아무리 선배들이 에이 아니야라고 했더라도 그 말을 믿을 수는 없다.
386은 X를 X는 MZ를 못마땅해 한다. 다른 세대를 못마땅해하는 것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면 MZ들에 대한 복수는 그 다음 세대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니 MZ들! 나중에 다음 세대들이 조직의 중심이 되는 난세 속에서 군말 없이 너희의 일을 거들던 우릴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지 말고, 지금 좀 잘하는 건 어떻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