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파란 하늘을 본 날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날씨는 꾸리꾸리 하다. 독일에 온 이후로 날씨는 계속 흐리고 쌀쌀하다. 여행에선 날씨가 정말 중요한데 그나마 일정이 길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이럴 땐 아이 덕분에 욕심을 많이 부리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욕심이 적으면 아쉬움도 적게 마련이다.
하루 정도는 의욕적으로 뉘른베르크 구시가지를 탐방해보기로 했다. 그 시작은 뉘른베르크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뉘른베르크 성. 성이라고 해도 프라하성처럼 거대한 규모라기보다는 진짜 방어를 위해 지어졌다는 느낌을 주는 소박한 성이다. 뉘른베르크라는 도시의 느낌도 딱 그랬다. 뭔가 굉장히 웅장하거나 아름다운 그런 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뤼벡이나 로텐부르크처럼 작은 도시도 아닌데 소박하면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첫 도시라 그런지 더 정감이 가기도 하고, 많은 관광객들로 엄청 북적이지도 않는다. 돌아볼수록 매력적인 도시다.
뉘른베르크 성 위에서 바라보는 구시가지의 모습은 전형적인 독일의 풍경이었다. 붉은 톤의 뾰족한 지붕들이 이어지는 말 그대로 '고색창연한' 모습이랄까.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 집을 그리라면 나는 늘 독일의 이런 집처럼 그렸었다. 거기에다가 굴뚝도 당연히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애들도 대부분 그렇게 그렸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는 그런 집이 거의 없는데 왜 그렇게 그렸던 것일까? 일종의 이상적인 모습이었을까? 독일의 집들을 보며 옛 생각이 났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야외에서도 수인이는 때가 되면 먹어야 하기에 야외에서 유모차에 눕혀놓은 상태로 서서 분유를 타서 먹였다. 이제는 이런 모습이 전혀 어렵거나 어색하지 않은 것을 보면 프로 아빠 엄마가 다 됐나 보다. 이렇게 해야 수인이의 상태도 더 좋고, 우리의 여행도 좀 더 수월해지니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으니 건강하게 잘 다니기만 해다오.
산책을 하다 보면 수인이는 유모차에서 잠에 들 때가 많다. 오래된 거리 위를 지나가면서 드르륵드르륵 하는 느낌이 좋나 보다. 그런 길에서는 잠에 더 잘 든다. 그때가 우리에게는 자유시간이 된다. 이날도 수인이가 잠에 들자 우리는 우리만의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첫 번째는 맥주집. 뉘른베르크 구시가지에 <트립 어드바이저(Trip Advisor)> 기준으로 굉장히 랭킹도 높고 평도 좋은 집이 있길래 얼른 그리로 갔다. 메뉴는 뉘른베르거 소시지와 양파 수프, 그리고 맥주. 압권이었다. 독일에서 먹은 소시지 중에서 가장 맛있었고, 맥주는 더욱 대단했다. 맥주를 워낙 좋아하는터라 지금까지 살면서 수많은 맥주를 먹어봤지만 이곳의 맥주는 거의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함께 시킨 소시지와 감자 샐러드의 조합도 정말 정말 짱이었다. 이런 맥주라니!
두 번째는 카페. 역시나 트립 어드바이저에서 굉장히 평가가 좋은 곳. 티라미슈와 커피를 시켰는데 만족스러웠다. 차가워진 몸을 데워주는 따뜻한 커피 한 잔, 향긋한 커피 향, 달콤한 티라미슈의 조화. 사실 맛이 없을 수가 없긴 하지. 별것 아닌 이런 소소한 행복이 사람을 참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면 그런 기회가 적다 보니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기회가 적은 만큼 순간순간이 더 기억에 잘 남으니까, 이런 것도 장점이 되려나.
늦은 오후가 되니 날씨가 갰다. 독일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파란 하늘이 눈앞에 나타났다. 더불어 따뜻한 햇살까지. 아... 정말 그때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날씨 하나 조금 좋아졌을 뿐인데 사람 기분이 이렇게나 좋아지다니. 말 그대로 눈부셨던 순간.
뉘른베르크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굉장히 유명하다고 한다. 우리가 가족사진을 찍은 그곳이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곳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갔을 땐 아직 먼 시기였기에 드문드문 천막들만 있었다. 수인이가 어린 터라 시장 구경은 아직 좀 무리다. 사람들에 치일 때면 유모차를 가지고 다니기도 힘들고, 또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수인이가 좀 컸을 때, 겨울에 뉘른베르크에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이것저것 쇼핑도 하고, 네가 어렸을 때 여기에 왔었다고 알려주기도 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상상만 해도 흐뭇해진다.
날이 활짝 갠 뉘른베르크 구시가지는 더욱 예뻤다. 중앙을 관통하는 작은 강가의 집들도 예쁘고,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집들도 더욱 멋져 보였다. 덕분에 이날 오후의 산책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참 좋은 곳이야. 비록 나치의 발상지이고, 나치 전당대회가 열렸던 흑역사가 있는 곳이지만. 여행자가 바라본 현재의 뉘른베르크는 적당히 크고, 적당히 예쁘고, 적당히 붐벼서 참 좋았다.
나중에 여행이 모두 끝나고 아내와 이런 말을 나눴다.
"독일에서 우리가 갔던 도시들 중에서 한 곳에서 살 수 있게 해준다면 어디서 살고 싶어?"
"음... 난 베를린? 다양하고 재미있으니까."
"나는 뉘른베르크! 사람도 적당하고, 필요한 건 다 있고, 게다가 중심부라 교통도 편리해서 살다 보면 어디든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아."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럼 나도 뉘른베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