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 온천 유람
이번 설에도 여행을 다녀왔다. 설 명절에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던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이번에는 우리 세 가족에 엄마 아빠를 더해 5명, 장소도 비행기로 1시간 조금 넘게 가면 도착하는 일본의 큐슈섬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여행을 가려고 한다. 비록 돈이 많이 들긴 하지만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시간이기에. 시부모님과 함께 가는 여행을 언제나 기꺼이 수락해주는 아내에게 새삼스럽게 고마울 따름이다.
수인이는 인천공항이 좋은가 보다. 12월에 갔던 홍콩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비행기가 이른 시각이라 집에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나왔기에 굉장히 피곤했을 텐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엄청 잘 뛰어놀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보안 검색대를 통과할 때 울지도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이다! 늘 울었는데... 이제 여기가 어딘지 알고 그냥 지나가면 된다는 것을 이해한 모양이다.
"세상에... 수인이가 보안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하다니."
우리 부부는 감격스러워서 말을 잇지 못했다. 많이 컸구나 우리 딸! 기특하다.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감동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번 여행은 총 4박 5일간의 일정이다. 마지막 날은 복귀니까 실질적으로 4일간의 일정. 부모님도 계시기에 이번에는 자동차를 빌렸다. 2016년에 벚꽃을 보러 후쿠오카에 왔을 때는 대중교통으로 다녔는데, 렌터카가 확실히 편리하긴 하다. 큐슈 곳곳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 볼거리도 더 많아지고. 물론 수인이가 잘 다녀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려서도 잘 뛰어놀고, 새로운 자동차에서도 카시트에 얌전히 앉아 이동한다. 아빠가 할 일은 <로보카 폴리> 노래 틀어주기, 그리고 운전, 이렇게 2개뿐이다. 역시 여행 체질인 우리 딸. 아빠는 정말 행운아야.
여행의 첫 2일 동안에는 온천에 집중했다. 먼저 간 곳은 벳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지옥천으로 유명한 곳이라 기대를 했는데 조금은 실망스러웠던 곳이다. 수인이는 신기한지 "욘기, 욘기" 하면서 잘 다녔지만 일단 사람이 너무너무 많았다. 게다가 다 단체 관광객들이라 굉장히 시끄러웠다. 신기한 물 색이나 맛있었던 온천 달걀은 좋았지만 굳이 다른 지옥에 또 가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전망대에 올라가서 바라본 풍경이 더 인상적이었다. 벳부의 여러 지옥천에서 올라오는 연기와 주변 집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다른 곳에서 쉽게 보지 못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렇게 벳부에 실망할 뻔했는데 호텔 온천이 좋아서 다행이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의 꼭대기에 히노끼탕으로 만들어진 노천 온천이 있었는데, 거기에 앉아서 취하는 휴식의 맛이 정말 일품이었다. 위는 차갑고 아래는 따뜻한 겨울 온천의 매력! 게다가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1~2명밖에 없어서 전세 낸 기분으로 즐겼다. 온천 마을로 유명한 벳부 답게 물 역시 온천물이라 조금만 있어도 피부가 매끈매끈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후에는 일본에서만 살 수 있는 삿뽀로 맥주 한 캔과 함께 마무리. 이 맛에 일본 오고 온천을 한다.
핵심은 역시 2일 차에 갔던 구로카와 온천이었다. 보통 구로카와 온천에 가면 마패를 사서 노천온천 세 곳에 많이들 간다. 하지만 세 곳은 무리라고 판단해서 2곳에만 갔다. 요금은 개별 결제. 마패를 사는 것보다 싸다. 3곳을 모두 간다면 마패가 200~300엔 정도 저렴하긴 하지만 우리처럼 1~2곳만 즐길 예정이라면 굳이 마패를 살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선택한 온천은 <코노유료칸>과 <이코이료칸>이다. 허리가 좋지 않아 바닥에 바로 앉지 못하시는 우리 엄마를 위해 입식 온천이 있는 코노우료칸을 먼저 갔고, 이후에는 예전의 추억이 담겨 있는 이코이료칸에 갔다. 역시나 평일이고 날씨도 좋지 않아 사람이 거의 없어서 좋은 노천탕을 우리가 전세 내는 기분으로 썼다. 이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부슬부슬 왔다. 게다가 산속에 있는 구로카와 온천 마을엔 안개가 굉장히 짙게 껴서 나중에 숙소로 이동할 때는 운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구로카와 온천에 후회는 전혀 없었다. 그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낸 곳. 역시 큐슈에서 온천을 한다면 구로카와 온천이 답인 것 같다.
특히 깜짝 놀란 건 수인이었다. 수인이가 이렇게 온천을 잘 할 줄은 몰랐다. 남탕과 여탕으로 구분되어 있기에 아내 혼자 힘들게 수인이를 돌보는 게 힘들까 봐 1차로 걱정이 되었고, 온천물이 좀 뜨거워서 수인이는 전혀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2차로 걱정이 됐지만 모든 것은 기우였다. 나중에 아내 말에 따르면 수인이는 물 만난 고기처럼 엄청 잘 놀았다고 한다. 2016년에 유후인에 갔을 때는 어려서 그런지 그렇게 활발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또 한 번 우리 딸이 많이 컸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이는 계속 자란다. 덕분에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도 계속 바뀐다. 언젠가 수인이가 더 크면 다시 와서 여유롭게 온천도 즐기고 저녁엔 맥주도 함께 하고 싶다.
구로카와 온천에 처음 왔던 건 2006년이었다. 나와, 지금은 결혼 한 둘째 누나와, 엄마 아빠, 이렇게 4명이었다. 당시 없는 돈을 털어 구로카와에서 손꼽히게 좋은 이코이료칸에 숙박을 했다. 모든 것이 신세계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 운동장 같았던 방, 료칸 안에만 7~8 종류가 있었던 온천, 객실에 딸린 전용 노천탕, 굉장히 맛있었던 가이세키 요리. '돈 값을 한다'는 말이 잘 어울렸던 좋은 경험이었다. 그 경험이 얼마나 좋으셨는지 엄마는 이번에도 이코이료칸에 꼭 다시 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코이료칸에 일부러 들렀다. 온천을 하면서도 아내에게 예전에 얼마나 좋았는지 설명을 해주셨다고 한다. 좋은 추억은 12년 만에 그렇게 다시 찾아왔다. 이코이료칸은 여전히 좋고 매력적이었다.
둘째 날 숙소 역시 온천 호텔이었다. 2일 내내 온천을 한 셈이다. 덕분에 몸 곳곳이 굉장히 부드러워져서 잠도 잘 오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더 좋았던 건 뿌듯해진 마음이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이 그렇다. 준비를 할 때는 귀찮기도 하고, 여행지에 와서도 우리 가족끼리만 다닐 때보다 챙길 것도 많지만, 여행을 오면 모든 것이 풀리고 좋아진다. 엄마 아빠가 온천을 정말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랬다. 우리 딸이 커가는 모습을 볼수록 신기하게 우리 엄마 아빠를 보는 내 마음도 함께 커지는 것 같다. 나도 저렇게 컸겠구나, 나도 이렇게 애를 많이 먹였겠지. 부모의 마음은 부모가 돼야만 알 수 있다는 말, 정말 그렇다.
몸도 마음도 모두 따뜻하고 푸근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