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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버 Dec 31. 2021

정신과 약을 끊어보았다.


정신과 약을 끊어보았다.

사실 '끊었다' 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끊은 이유가 의사에게 "이제 그만 드셔도 돼요"라는 어떠한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무기력하며, 부정적인 강박적 사고에 사로잡혀 삶의 질이 많이 떨어져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접촉사고가 났다.

연말 액땜을 하는 것인지, 내 차의 운전석을 그대로 들이 받혀 차 문이 안열릴 정도였으니 내 몸도 꽤 충격을 받았다. 원래 달고 살던 목통증이 심해져서 처음으로 입원을 했다. 기존에 다니던 신경외과가 있는 종합병원에 입원할 생각이었으나 코로나 등 여러 사정으로 추천받은 한의원으로 들어갔다.

사실 그동안 한의원이라고 하면 양방보다는 덜 과학적이고, 덜 체계적이고, 덜 효과적인 느낌....?

조금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래도 시간 내서 입원했으니 열심히 치료받자는 생각이었는데, 입원 둘째 날 스트레스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식도가 타는 듯이 쓰리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간호사실에 얘기하니 처음 상담받았던 의사가 아닌 곰돌이 같은 푸근한 인상의 대표원장과 상담을 받게 되었다. 추가로 약을 처방해주겠다며, 현재 앓고 있는 질환과 복용 중인 약이 있는지 매뉴얼처럼 물어보기에 나는 항상 핸드폰 앨범에 가지고 다니는 약봉지 사진을 들이밀었다.


사진을 보던 대표원장은 신경정신과 약을 먹는 이유와 복용기간을 물어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거의 1시간 가까이 상담을 하게 되었다. 심리상담을 받는 것도 아니고 의사와 1:1로 이렇게 시간을 상담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심리상담을 병행한 적이 있었다.

1회에 10만원 초반이라는 금액이 가격적인 면에서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받는 동안 부정적인 마음이 더 크게 들었기에 중도에 그만두었었다.


(내 경우에는)  상담 초반에는 후련한 마음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매번 잊고 싶은 부정적인 얘기들을 털어놓는 게 왠지 모를 자괴감과 우울한 마음이 들고 약간 현타가 오는 기분이었다. 남들은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있는데 나는 과거에 사로잡혀서 한탄하며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싶은 마음들이었다.


특히나 치료를 위한 것이지만 남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을 그 얘기들은, 내 잘못은 아니지만 굳이 남에게 들켜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치부같이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상담을 받고 나오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 농부처럼 속이 후련하면서도, 왠지 모를 수치심과 자괴감이 느껴질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속마음으로는 소위 잘 나가고 똑똑하고 부자인 의사가 내 마음을 뭐 얼마나 이해하겠어?라는 괜한 피해의식과 못난 마음도 있었다.






그 뒤로 따로 심리상담을 받지도 않았고, 정기적으로 정신과에 약을 타러 갈 때에도 내 얘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더욱이 여기는 접촉사고로 입원한 한의원이니 정신과에서나 할 만한 얘기들을 이렇게 길게 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대표원장의 푸근한 인상과 다정한 목소리 때문인지, 왜인지... 나는 물어보는 말에 어느새 내 얘기를 줄줄 내뱉고 있었고, 원장님도 자연스럽게 본인과 가족 얘기를 솔직하게 말해주셨다.


원장님의 아버지는 우리 아빠와 비슷한 유형의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분이었다. 그리고 원장님의 여동생은 나와 비슷하게 감정적이고 예민한 기질을 타고나, 무던한 본인보다는 어렸을 때 겪었던 가정폭력의 멍울이 더 깊게 남아있어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의사와 환자 간의 라포(상대방과 형성되는 친밀감, 신뢰관계) 형성이 치료에 중요하다는데, 이런 게 라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표원장은 내가 이제껏 만나본 수많은 똑똑한 사람 중에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손에 꼽을 정도로 언변이 뛰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장은 이렇게 얘기했다.



일단 3개월만 먹어봐요



다니고 있던 병원에서는 최소 5년 이상, 아니 임신을 해서도 정신과 약을 먹어야 하고, 끊을 생각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먹어야한다고 했다. 좋다는 병원을 찾아 여러곳을 옮겨 다니다가, 더 이상 새로운 병원에 가서 내 얘기를 털어놓는 것 자체에 지친 후로 마음을 비우고 다니고 있는 곳인지라, 약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면서도 불안함 마음에 쉽게 끊지도 못했다.



그런데 3개월??? 물론 3개월이면 낫습니다!  아니었고, 기한을 정해준 원장의 말을 믿고 싶은 마음에 3개월이라는 숫자에 꽂힌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평생 먹을 생각이었던 정신과 약을 끊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어떤 희망같은게 생겼다는 사실.


그리고 대표원장의 엄청난 언변과 어린시절 경험한 가정폭력이라는 동질감 때문에 형성되어버린 친밀감 때문도 있겠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정신과적인 질환에 쓰이는 한약의 기전을 과학적인 이론과 함께 설명하며 자신에게 직접적인 이득이 없는 다른 방법들을 함께 제시하며 꽤 구체적인 치료계획을 짜주었기에, 평생을 벗어날 수 없을거라 생각했던 나의 불안과 강박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정도로 마음이 몽글거렸다.



 




조현병과 같은 정신질환에 비해 우울증, 강박증과 같은 기분 질환은 현대인의 감기라 불리며 가볍게 여겨진다. 원래 인간은 적당한 우울과 불안함을 가지고 사는 게 정상이고, 특히나 요즘같이 스트레스가 많고 남과 비교하기 쉬운 시대에 어느정도의 우울함은 기본값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생에 치여 바쁘게 살다 보면 스스로도 심각성을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간만 흘려보내기 쉽고, 나중에는 객관적인 힘든상황과 치료시기는 지나가버린 후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나약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몰라 자괴감에 빠지고 어찌할 바를 모를때가 많다.


어렸을 때는 30대가 되면 현실적으로 많은 걸 이루고 마음도 안정된 '진짜 어른'이 돼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겉으로는 뭔가를 이룬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름 이성적인 어른인 것처럼도 보이지만, 실제 마음의 단단함은 10대 때보다도 부서지기 쉬운 모래성 같은 상태일 때가 많다.


더 자주 무너지고 더 자주 숨고 싶다.




모든 사람은 본인의 의지를 가진 의식과 무의식의 지배를 동시에 받으며 살아간다. 다만 건강한 사람은 의식과 무의식의 겹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좁고,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은 그 겹치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넓어 어린시절 트라우마같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정신과 치료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건강한 의지력이 무의식의 지배를 덜 받게 하는 것.

이때 방법적인 측면에서 양방과 한방의 치료방법이 달라진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정신과 약인 양약은 나의 의식을 접어서 무의식과 겹치는 부분을 줄이는 것. 그래서 약을 먹으면 의식이 흐려진 듯 멍하기도 하고, 자주 깜빡깜빡할 수 있다. 하지만 효과는 비교적 확실하다. 반대로 한방은 겹치는 부분은 그대로 두고 의식 부분을 강하게 더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물론 설명만 들으면 훨씬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의지력을 키우는데 한방치료 외에 플러스로 본인의 의지가 많이 필요하기에, 대부분의 무기력한 기분질환 환자들에게는 멀게만 느껴진다.





지금 나는 여전히 무기력하고 불안정하지만, 정신과 약을 끊고 나의 의식을 단단하게 만들어볼 의지가 생겼다.


어찌 보면 양약(정신과 약)에서 한약으로 옮겨간 거 아닌가?라는 패배적인 생각도 들지만, 나의 의식을 강하게 만들어 나의 의지로 건강해지려는 첫걸음을 디뎠다는 점에 의의를 둬볼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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