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이산가족이 되다.
자퇴하겠다는 한마디를 폭탄처럼 투척한 후 정말로 딸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아침 학교갈 시간이 되어도 딸의 방문은 요지부동 열릴줄을 몰랐다.
우리집에 폭탄이 떨어진 적이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평상시처럼 딸아이를 깨워보기도 했다.
어느날은 단호한 어조로 너 오늘도 학교 안가면 너죽고 나죽자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어느 날은 도대체 왜 그러는거냐? 누가 널 괴롭히냐? 무슨 문제가 있냐? 대답으로 돌아올리 없는 공허한 질문을 하고 또 하며 울기도 했다.
학교 담임선생님에게 상황을 알리는 이메일을 보냈다.
국제학교였던 딸의 학교는 이런 상황에서도 굉장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는 딸과 이야기를 나눠보겠노라 했다.
나는 왠지 그말이 천군만마를 얻은 듯 반가웠다.
‘엄마 말은 안들어도 선생님말은 들을지도 몰라’
학교에서는 카운슬러 선생님과 딸아이의 정기적인 미팅 시간을 잡아주었다.
다행히 딸아이도 학교측의 배려와 카운슬러 선생님과의 상담 등을 통해서 차츰 안정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딸아이는 공부를 해서 대학을 진학하고 남들 다가는 직장에 다니다가 결혼하는 그 평범함을 거부했다.
하고 싶은 게 있고, 그건 지금 태국에서 하기엔 적절치 않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아이를,,, 학교 선생님들이라도 잡아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펼쳐졌다.
학교는 물론 모든 상황들이 일순간 멈춘 듯했고 모든 활동들이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와 자취를 감추기에 급급하던 시절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학교가기를 거부하던 딸아이에게는 등교를 할 수 없었던 시간들과 온라인 수업으로의 전환이...
그러나 합법적으로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시간동안 딸아이의 방문은 더욱 굳세게 닫혔고, 이젠 억지로 학교에 가라고 등떠밀 일도 없어지니 아이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의 발목이 붙잡혔지만 딸아이의 마음은 붙잡질 못했다.
결국 딸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그 해 여름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더는 딸아이와 실랑이를 벌일 수 없었고, 단순한 사춘기의 반항일 줄 알았던 딸의 입장은 자기의 인생 전체를 두고 고민하고 방황한 흔적의 끝이기에 더는 이곳 태국에 머물러서 마음을 돌이키기만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딸이 하고자 하는 일은 학력이 필요없기에 학교를 다니는 그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 자퇴를 원하는 주요 이유였다.
2년반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지칠대로 지쳤고, 아플대로 아팠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한 곳에 모여서 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어쩔때는 오히려 더 힘들 수도 있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다섯가족이 잠시라도 떨어져있으면 그 단단한 철옹성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불안했던 그 때.
이미 큰 아들이 대학진학을 이유로 가족과 떨어져 유학을 하게 되면서 매일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것 같았던 다섯명의 가족 구성원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진 것 같은 알수 없는 마음의 허전함을 경험한 터였다.
대학진학을 통해서 집을 떠나는 것만이 자녀가 집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는 주된 이유이자 유일한 이유인줄만 알았던 나에게 그보다도 더 일찍 그리고 다른 이유로 집을 떠나는 일이 생긴다는 것을 감당하고 이해하기까지 걸린 시간들이었다.
나와 딸은 한국에 가기로 했고, 막내아들은 이 곳에 아빠와 남아서 학교를 계속 다니기를 원했다.
코로나가 조금씩 세력을 잃어갈 무렵 우리 가족은 신 이산가족이 되었다.
유학 중 코로나라는 초유의 복병을 만나 한국으로 피신하듯 들어와서는 상황이 장기전이 되자 휴학을 하고 군입대까지 한 큰 아들과 자신의 꿈을 향해 한국으로 가는 딸, 그리고 이게 다 뭔 난리야 싶은 어리기만 했던 막내아들까지...
그렇게 딸아이는 엄마인 내게, 막내아들은 아빠에게, 큰아들은 나라에게 맡겨진 채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향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