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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 위의 침묵

by 낙화유수

호수는 폭발이 잦아든 뒤에도 정적을 되찾지 못했다. 수면 위를 떠다니는 금속 조각이 서로 스치며 찌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그 소리는 살아남은 자들에게만 들리는 숨죽인 비웃음 같았다. 바람은 연기와 탄 냄새를 싫어와 눈을 따갑게 하고 목을 조여왔다. 기름막 위에서는 햇빛이 뒤틀린 무늬로 퍼져 나갔다. 반짝임은 잠시 아름다워 보였으나, 곧 죽음을 반사하는 잔혹한 거울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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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1: 폭발 직후 호수 위에 흩어진 금속 파편과 기름막


관중석은 공포와 혼란에 잠겨 있었다.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아이를 안은 어머니는 눈동자를 굴리며 출구를 찾았다. 청년 하나는 손바닥에 핏자국이 묻은 채 핸드폰을 부여잡고 화면을 켰다가 곧 꺼버렸다. 노인은 묵주를 움켜쥐었지만 입술이 떨려 기도문조차 이어가지 못했다. 기자는 무릎에 쓸린 채 바닥에 앉아 카메라 대신 손가락을 쥐어짜며 분노를 삼켰다. 관중들 사이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속삭임이 번졌다.

“이건 사고가 아니야…”

“누군가 짠 거다.”

“테러일지도 몰라.”


그 와중에도 몇몇의 시선은 수면 위를 향했다. 불길에 휩싸여 가라앉은 보트들 사이, 낡은 알루미늄 바디의 고철 같은 배 한 척만이 떠 있었다. 그 위에 선 한준.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지 못한 채 숨을 고르며, 땀에 젖은 손으로 낚싯줄을 더듬었다. 왜 난 살아남았지. 혹시 누군가 내 자리를 미리 마련한 건 아닐까?


심장은 가슴을 찢을 듯 두근거렸다. 땀방울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려 배 바닥에 떨어졌다. 살아남은 건 기적이 아니라 경고일지 모른다.


심판석은 침묵으로 얼어붙었다. MC는 마이크를 쥔 채 입술만 달싹였고, 카메라는 불길만 비췄다. 무전기에서는 절규와 속삭임이 뒤섞였다.

“기자들 접근 차단해… 영상 다 지워.”

“연방 채널은 지금 끊어! 우리 쪽 보고만 남겨!”

한쪽은 고함, 다른 한쪽은 속삭임. 통제하려는 자와 감추려는 자가 동시에 드러나 있었다.


찰스 협회장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미소는 굳어 있었지만 눈빛은 흔들렸다. 이건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야. 돈과 정치, 그리고 자신의 자리의 문제였다.

리사는 펜을 움켜쥔 채 메모장을 펼쳤다. 맨 위에는 ‘사고?’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멈춰 섰다. 이걸 그대로 두면, 나는 공범이 된다. 갈등 끝에 줄을 그었다. 그러나 곧 다시 펜을 들었다. 종이를 찢을 듯 눌러 단어 하나를 남겼다. ‘의도’. 잉크는 번지고, 손끝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얼룩을 만들었다. 두려움이 잉크와 함께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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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2: 메모장 위에 ‘사고’가 지워지고, 굵은 ‘의도’라는 글씨가 번지는 장면


리처드는 얼굴에 검댕을 뒤집어쓴 채 소리쳤다.
“이건 테러다! 누군가 나를 노린 거다!”
목소리는 갈라졌고 손짓은 격렬했다. 그러나 군중은 차갑게 갈라졌다. 대부분은 아직 충격에 얼어붙어 있었고, 일부만이 속삭였다.
“또 아버지 뒤에 숨으려는 거야.”
“역시 권력자 아들.”

리처드의 눈은 충혈됐고, 그의 몸짓은 격앙되었지만, 그 과장은 오히려 설득력을 잃게 했다.


라울은 난간에 기대 담배를 돌리며 웃었다. 그 웃음은 짧지 않았고, 마치 귓속에 흘러드는 낮은 울림처럼 퍼졌다.
“Bienvenido al verdadero juego.”
(진짜 게임에 온 걸 환영한다.)


그의 시선이 한준을 향했다. 도망치려는 듯 눈을 돌렸지만, 그 차가운 시선은 이미 한준을 포박한 듯했다. 나는 이 판의 일부다. 원치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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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3: 라울이 난간에 기대 웃고, 리처드가 분노 속에서 외치는 장면


멀리서 사이렌이 울렸다. 보안관 차량이 현장을 봉쇄하며 돌진해 왔다. 권총을 찬 인력들이 경기장을 가르자 군중은 갈라졌다. 그 앞에 선 이는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쓴 체격 큰 사내, 한준의 외삼촌이었다.

“모두 진정하십시오! 경기는 즉시 중단 하겠습니다!. 그리고—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의 선언은 파도처럼 관중석을 흔들었다. 일부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고, 다른 일부는 더 깊은 공포에 휩싸였다. 찰스는 무전기를 쥐고 눈을 내리깔았다. 리사는 숨을 고르며 펜을 들어 기록을 있어갔다. 라울은 담배를 짓눌러 끄며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 순간, 관중석 끝자락에서 검은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발걸음마다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스치면서도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주머니에서 작은 금속이 느리게 드러나 햇빛을 반사했다.

그의 눈빛이 한준을 붙잡았다. 얼음처럼 차갑고, 말없이 경고했다.

한준은 직감했다. 폭발은 시작일 뿐이다. 진짜 위협은 이제 막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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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4: 무대 위 보안관의 선언에 술렁이는 군중, 끝자락에서 다가오는 검은 모자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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