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그 모습 그대로인데

왜 이제는 그 모습이 날 힘들게 하는 건지

by 헤리나

엄마의 전화

"느그 아빠 또 삐지가 밥 안 잡숫는다"

"왜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모르겠다 이유도 없다 괜히 그칸다"


잠시 후 모르는 척 아빠께 전화를 건다.

"아빠 뭐 하세요?"

"느그 엄마 늙으니까 치매 왔는가 기마키 죽겠다."


사건의 전말

엄마는 친구분들과 다낭 여행 다녀오는 길이다. 착륙하자마자 걸려온 아빠의 전화 "비행기 인자 내맀나?"

"예~ 언제 갈동 모린다 기다리지 마소"

(말한 시간보다 30분은 더 일찍 문 열고 기다릴 아빠 성격을 알아서)

"응"

(기다린다고 하면 서둘다가 뭔가 실수할 엄마 성격을 알아서)


대답을 한 아빠는 일찌감치 지하철역 엄마가 나올 출구 앞으로 카트를 들고 가 기다린다.

아빠는 예상 시간보다 20분은 더 일찍 가 있고 엄마는 예상 시간보다 20분 더 늦어서 아빠는 지하철역 입구에 서서 40여분을 기다린다.

마침내 출구에 나타난 엄마는 일행 중 한 명과 즐겁게 이야기 나누며 오고 계신다.

아빠와 눈이 마주치자 "(일행 분을 향해 인사하며) 예 가세요~"하고 일행을 보낸다.

(같이 있던 일행은 작년에 상부한 분이라 아빠가 기다리는 모습 보이는 게 괜히 미안해 서로 소개하는 시간 생략해 버림)

여행가방을 아빠의 카트에 턱 올리며 "말라꼬 나왔는교 집에 안 있고" 하고는 그대로 쌩하니 집으로 향한다. 집까지는 300미터 남짓으로 거의 집 앞인 셈이다.

(화장실이 너무 급해 빠른 걸음으로 가버림 )


아빠가 엄마의 여행가방이 올려진 카트를 끌고 뒤늦게 아파트 1층 현관에 도착해 보니 엄마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벌써 올라가는 중이다. 기가 막힌다.

(여행가방 바퀴 구르는 소리가 아파트 주민들께 민폐일 것 같아 소리 없이 부드럽게 구르는 카트를 가져가 가방을 실음)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노'

(마중 가서 40분을 서 있었는데 본체만체하고 쌩하니 가버린 엄마가 너무 섭섭하심)

아빠가 뒤늦게 집으로 들어서니 현관엔 엄마가 툭 벗어 놓은 신발이 있고 엄마의 동선을 따라 면세점 쇼핑백들과 크로스백이 줄줄 거실에 놓여 있다.

마침 안방 화장실에서 나오던 엄마는 아빠께 말한다.

"더븐데 말라꼬 나와 바라꼬 서있는교?"

(오래 기다렸을 것이 뻔한 아빠를 보니 미안해서 그제야 건넨 인사)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아빠는 그냥 대꾸를 안 하시고 엄마가 흘린 옷가지를 집어 제자리에 올린다.

엄마는 아빠가 화나신 줄 모르고 당신의 즐거운 여행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는데 며칠 후 여전한 엄마를 보니 지난번 마중 사건까지 겹쳐 화가 나 밥을 안 드셨고 엄마는 또 무슨 영문인지 모르신다.


젊어서 몸도 약하고 내성적이었던 아빠는 하얗고 통통한 엄마가 예뻐 보여 첫 데이트를 하게 되었고 엄마는 아빠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한 번 만나 밥도 얻어먹고 퇴짜를 놓으면 보드라운 저 남자가 상처받을까 걱정되어 밥값을 먼저 내어버렸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아빠는 "바로 이 여자다 나와 함께 인생을 헤쳐나갈 배우자!"라는 느낌이 와서 계속 데이트 신청을 하였고 둘은 결혼하게 되었다.


아빠의 보는 눈은 정확해서 인생의 굵직한 결정에 엄마의 결단력이 작용하고 돌아보니 옳은 선택들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더욱 인정하고 사랑하며 귀여워하였다.

꼼꼼하게 따지고 걱정 많은 아빠와 달리 결정도 빠르고 잠도 잘 자는 엄마가 부럽고 좋았단다.

차만 타면 자는 엄마를 보며 '나를 믿고 저리 자는구나 더 살살 운전해야지'하는 마음으로 부드럽게 운전하였고 '저 여자는 세심하지 않으니 스트레스도 덜 받겠구나'하며 건강체질이라 좋아하였다.


털털한 엄마 꼼꼼한 아빠인 건 변함이 없는데

나이 들어 몸이 약해진 아빠의 마음이 변했다.

아빠의 당부를 번번이 잊는 엄마에게 왜 그랬냐 물으면 "까뭇뿌따!"하고 넘어가는 엄마를 보니 꼭 남편을 무시하는 것 같다.

여기저기 오라는 데 많고 다 가는 엄마

다리가 약해져 바깥보다 집이 편한 아빠

엄마는 종일 집 안에만 있는 아빠가 답답하지만 동행을 거부하니 혼자 다닐 수밖에

엄마 마음 편하게 해 주려고 어디든 다녀라 내 신경 쓰지 마라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주 섭섭한 아빠


엄마와 통화하면 엄마 마음 알겠고

아빠와 통화하면 아빠 마음 알겠는데

두 분을 합치니 방법을 찾기 어렵다.


사랑이 지속되려면 정으로 변해야 가능하다는데

내가 사랑했던 그 모습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사랑의 지속을 위한 변형일까.

사랑이 정으로 변한 두 분이 노년에 이러시니 애매한 우리 부부의 사랑은 어떻게 변할지 벌써 두렵다.


아침에 집 나서는 아내를 위해 바나나를 톡톡 잘라 담고 두유 한 팩과 같이 가져가라며 주는 남편

걸음 느린 남편 팔의 짐을 "내가 들게 주소"하며 빼앗아 드는 부인

이런 서로를 보며 안 맞음이 아니고 늘 사랑이었음을 발견하길 바라본다.




나와 간 여행에서도 앞서 걸어가시는 엄마
빠른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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