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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수 Jun 14. 2024

미움에는 도리로 맞서라

미움은 도리로 다스려라(그림;.bing.com)

     

 마음속에 일렁이는 미움을 도리로 다스려 나가라!     


 누구나 사람인 이상, 살다 보면 타인에 대해 여러 미움의 감정이 불쑥불쑥 생겨날 때가 상당히 많다.

 이렇게 우리가 타인을 미워하게 되는 경우라면, 대개는 아래 두 가지의 형태로 마음속 감정과 반응이 일어날 것 같다.

 그 첫 번째 유형으로는, 성격적으로 비교적 온화하거나 젊잖은 사람의 경우인데, 이들은 가급적 그 미운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려 하거나, 가급적 서로 여러 일들로 엮이지 않으려고 애쓴다.


 때로는, 가급적 쳐다보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만나지 않도록, 혹은 절대로 조금의 피해도 더 이상은 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이들은 보통 성품이 유순하거나 다소 감성적인 사람인 경우가 많아서, 나중에 만약 그 미움이 자신의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결론되면, 바로 사과하는 이들이 많다.

 설령, 자기 자존심으로 인하여 정식으로 사과는 안 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미안해 하기는 하면서, 그 복구(만회시킴)를 위한 노력을 알게 모르게 행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두 번째 유형으로는, 성격적으로 비교적 고집이 세거나, 아주 사나운 사람의 경우인데, 이들은 자신이 미워하게 된 사람에 대해 주변으로 마구 흉을 보고 다니거나, 어떤 음흉한 모략을 꾸며내려 하거나, 크고 작은 대결 구도를 만들어 미워하는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려고도 한다.

 이는 물론, 첫 번째 유형보다 더욱 심각한 경우라고 하겠다.

 이들은 때로 아주 미약한 근거로 상대를 미워하고, 음해하려고까지 하며, 나중에 그 미움이 자신의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판명이 나더라도, 결코 사과 따위는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큰 사고를 저지르고도 복구하거나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막무가내인 것이다.    



미움에는 도리로 맞서라(그림;.bing.com/images)


               

 위에 언급한 두 번째 유형은 당연히 최악에 가까운 유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첫 번째 유형도 그리 좋다고 볼 수는 없다.

 첫 번째 유형은 다소 소극적인 성향이 짙어서, 미움의 감정을 그대로 방치해 두거나, 아주 오래 끌고 갈 수가 있고, 그 관계의 회복을 위해 별로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 사회적 인간관계 측면에서는, 아주 큰 취약점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 미움의 감정이 자기 스스로를 마구 갉아먹게 하여, 심리적으로 아주 큰 고통에 시달리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또한, 우리가 꼭 무슨 거창한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사회생활 속에서는 늘 어제의 적이 오늘이나 내일의 중요한 동지 내지는 협력자가 될 수 있기에, 자기 묵은 감정이나 미움의 마음을 그때그때 잘 떨어낼 수 있어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사회적으로 훨씬 더 용이하게 얻어 나갈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미움이라는 부질없는 감정의 볼모가 되어버린다면, 이는 그러한 기회를 한사코 발로 차서 거부하려는 격이 되어버리는 것이겠다.       


 결국, 정답은 첫 번째 유형도 두 번째 유형도 아닌 바로 ‘도리의 견지’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도리의 견지’라는 의미는,  미움의 감정이 발생하더라도 자신이 마땅히 지켜주어야 할 도리에 대해서는 결코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다.

 즉, 살다 보면 누구나 순간순간 미운 감정이 발생하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겠으나, 그러한 유쾌하지 못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도리는 도리대로 계속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도리’라 함은, 그게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고, 쉽게 말하자면, 미우나 고우나 차별하지 않고서, 떡은 동일하게 나누어주는 심정이랄까 혹은 아무리 미워도 자기가 할 바는 다하는 심정이랄까, 아니면, 아무리 밉더라도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를 잘 인정해 주어, 더 이상의 대결 구도는 피하고서, 그 상황이 더 이상은 악화되지 않도록 잘 관리해 주려는 이해력과 관용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과연 이렇게 하여, 점차 나중에 당신의 진심이 전달되거나, 우연히 오해가 잘 풀리거나, 아니면 그냥 시간이 약이 되어 좋은 기회가 다시 찾아오게 되면, 그때는 보다 용이하게 그 관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를 드디어 잡을 수도 있게 된다.

 이런 도리의 마음을 잘 지닌 인물이라면, 이른바 ‘미움을 도리로 맞설 줄 아는 인격’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미움을 도리로 맞설 줄 아는 인격’을 선호하려고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결국은 자기 마음을 아주 잘 다스려야 가능한 문제일 것이니, 결코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 어떠한 미움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아주 차분하고 기꺼이 ‘도리’로서 맞설 줄 아는 법을 잘 체득하여, 이를 습관화 하여 둔다면, 이는 적어도 자기 멘탈 측면에서는, 평생 자신의 든든한 백(우군)이 되어줄 것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여기서, ‘미움을 도리로 맞설 줄 아는 인격’을 잘 실천할 수 있는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미움의 감정과 자기 도리를 완전히 구분하여라.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과연 미움이라는 감정이 여기저기서 전혀 생기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움의 감정이 생겼다고 하여, 상대와 척을 지고 살려고만 하지 말고, 상대에게 앙갚음을 하려는 소인배의 마음은 더더욱 가지지 말고서, 일단은 그 미움이라는 감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지켜줄 필요가 있는 관계적 도리를 잘 구분해 보아라.  

   

 예를 들어, 직장 생활 중, 동료 간에 하나의 사안을 가지고, 그 처리하는 과정에서 큰 갈등이 생겼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직장 생활에서, 아무리 친하고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특정 사안에 대한 해석 방법이나 생각, 시각 등이 다르다면, 충분히 다툴 수 있고, 때로는 이런 다툼이 빌미가 되어 아주 오랫동안 척을 지고 지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니, 당신의 주장이 참으로 맞고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충분한 설명과 토론을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냥 상대의 손을 들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도의 결정마저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겠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결정 이후에 도사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신이 아무리 생각을 곰곰이 잘해 보아도, 심정적으로는 절대 아니라고(No라고) 생각하는 길을 걷게 된 경우라면, 마음이 결코 내키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그 동료와의 어떤 일에도 협조를 잘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생겨날 수 있고, 때로는 그 어떤 딴지를 걸고 싶어 하거나, 마구 훼방을 놓고 싶은 심리가 발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그 미움의 감정과 당신의 도리를 철저히 구분하여 한번 대응해 보아라.

 미움은 미움대로 당분간 깊은 서랍 속에 잘 보관해 두고, 일단은 당신이 협조해야 할 부분이나 도리는 끝까지 한번 견지해 주어 보아라.

 같은 회사, 같은 팀의 동료로서 계속 도울 것은 돕고, 서로 필요한 협조는 그대로 주고받아 보아라.

 만약 당신의 최초 주장이 정말로 온당하고 합당한 주장이 맞다면, 나중에 그 동료가, 자신의 오해나 실책을 인정하여, 당신에게 사과를 해 올 수도 있다.


 설사, 그러하지는 못하더라도, 당신의 그런 대인배적인 기질에 흔쾌히 좋은 감정으로도 다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당신이 당신 최소한의 도리를 계속 잘 견지해 준다면,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이후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질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

                   

미움의 감정과 도리를 완전히 구분하여라(그림;.bing.com/images)



 둘째, 균형과 관리의 능력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위의 사례를 계속 한번 살펴보자

 서로 충분히 미울 수 있는 감정의 상태에서도, 이러한 감정을 잘 억눌러 관리하고, 더 이상 덧나지 않게 한다면, 서로 묵은 감정이 결국은 해결되고, 일부 오해가 있었더라도 충분히 정리될 것이고, 언젠가는 상황이 회복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의 감정을 잘 달래고, 이성적으로 관리해 나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필요 거리(서로 더 이상의 감정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공적 혹은 업무적으로는 도울 수 있는 거리)를 잘 알아서 챙기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이러한 필요 거리를 잘 유지하려면, 너무 가까워서 서로 상치받지 않을 만한 심리적 거리 그리고 너무 멀어서 서로 소원해지거나 돕기에 불편해지지 않는 심리적 거리를 잘 찾아서, 때때로 밀당(약간 더 멀리도 해보고, 약간 더 가까이도 해 보면서, 조금씩 더 최적 거리에 수렴해 나가는 방법)을 해가면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이런 필요 거리를 잘 찾아다면, 그 거리에서 잘 균형을 맞추고, 유지 및 관리해 나가는 능력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야 더 이상 마음을 다치는 일도 줄일 수 있고, 업무적으로 해야 할 바(도리)도 잘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또한, 이러한 필요 거리는, 사람의 성격 차이, 사건의 상황이나 조건의 차이 등에 따라서도 모두 다를 것이니, 일괄적으로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닐 것이며, 오로지 스스로가 잘 판단하여, 아주 편하지는 못하더라도 너무 불편하지는 않은 정도의 거리, 사태의 균형을 잡아 잘 관리할 수 있는 거리,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관계적 최소한의 도리를 결코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거리이어야 하겠다.     


 이렇게 관계적 거리를 적절히 잘 유지해나가다 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일을 둘러싼 정황이나 상황은 언제나 변할 것이니, 나중에 입장이 서로 역전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즉, 처음에 당신이 주장한 바를 다른 대부분의 동료들이 인정하여, 당신에게 그 뜻을 펼칠 기회가 찾아올 수도 있다.

 이렇게 큰 우여곡절의 후라고 한다면, 회사원 혹은 팀원 모두가 인정해 주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니, 드디어 얼마나 유리한 기회가 당신에게 찾아온 것인가?     


 반대로, 최초 당신의 주장이 틀렸고, 상대의 주장이 맞아, 그러한 상태로 일이 정상적으로 잘 풀려나갔을 경우에도 당신이 그 일에 충분히 협조를 잘한 경우가 될 것이므로, 그 일의 일등공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협조자 정도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결과는 당신이 아주 균형 잡힌 처신 혹은 겸허한 처신(미래에 일의 결과라는 것이 과연 어느 쪽으로 흘러갈지를 과연 그 누구도 장담하기 힘들다는 자각에 입각한 처신)을 잘하고, 또 미움을 또 다른 미움으로 다시 받아치지 않고서 잘 관리한 덕분일 것이다. 

    

 즉, 당신이 모든 사안에 대해 좀 더 대승적으로 생각하여, 초기의 아주 큰 미움과 갈등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이를 결코 폭발시키거나 앙갚음 같은 것을 결코 하지 않고서, 오히려 협조를 잘해 나갔더니, 나중에는 그 일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더라도(성공을 하더라도, 실패를 하더라도), 당신이 비교적 편안해질 수 있고, 오히려 좋은 기회나 결과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겠다.     


 그리고, 위에 든 사례를 부부관계, 부모와 자식관계, 친구나 가까운 지인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심지어는 일반 대인관계 등, 그 어디에 대입하여 보아도 유사하게 설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인지상정’에 가까운 근본적인 인간관계의 지혜에 관한 문제일 것이니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예를 몇 개 들어 보면, 

 부부가 부부 싸움을 하였다고 하여 미운 감정이 생겨나서 생일이나 기념일, 가족 대사(大事) 등을 안 챙긴다든지, 자식이 부모에게 잔소리를 좀 들었다고 하여 인사를 하지 않고 다닌다든지, 친구나 가까운 지인과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다고 하여 인륜지대사에도 찾아보지 않는다든지 해서는 아주 곤란하겠다.

 아무리 미워도 도리는 도리대로 잘 지키고 챙겨주어야, 그 관계가 덧나지 않고서, 잘 아물어 갈 수 있을 것이고, 나중에 당시의 자기 처신에 대해서도 스스로가 결코 밉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이웃 관계에서 못마땅한 일이 발생했다고 하여 주변에 뒷담화를 흘리고 다닌다든지, 심지어는 상대방의 말투나 행실에 화가 난다고 하여 멱살을 잡거나 상대에게 모욕을 주려 하는 등의 경우도 역시 미움을 대하는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셋째, 긴 안목과 계책을 지녀라.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작은 일에 대해 서로 이해가 상충된다면 혹은 자기주장이 잘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면, 막 화를 내거나, 그다음부터는 전혀 서로 협조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는 참으로 근시안적이고 마구 일그러진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초기에 당신의 주장이 아무리 맞고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그 결과는 반드시 당신이 예상한 대로 나오란 법이 없다.

 그러니, 미래에는 당신이 예상치 못한 여러 경우가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니, 아주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아주 조그만 문제부터 아주 복잡하거나 첨예한 문제까지, 절대 욕심을 내지 말고서, 조급증이나 조바심 같은 것은 더더욱 내지 말고서, 오로지 겸손하고도 긴 안목을 지니고서, 뚜벅뚜벅 나아갈 필요가 있다.

 도중에 일이 잘 풀려나갈 때에도 결코 자만하지 말고, 일이 잘 풀리지 못할 때에도 결코 낙담하거나 포기하려는 나약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서, 그 옛날 한(漢) 고조, 유방의 책사인 장량이 하였듯, 마치 천리를 내다보는 긴 안목으로 당신이 나아갈 방향을 한번 가늠해 보아라.    

 

 그는 초한전쟁 당시, 매 위기의 순간마다, 마치 천리를 내다보는 듯, 탁월한 예지력과 전략으로 유방을 도와, 한(漢)이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했던 인물이다.


 돌이켜 보면, 항우가 파 놓은 함정이라고 할 수 있는 ‘홍문연’에서 죽을 고비에 처한 유방을 구해냈던 일도, 진왕의 자발적인 항복까지 받아 낸 유방이 진시황 시절에 남겨진 셴양의 온갖 재물과 아방궁 등의 아주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 것들에 빠져 헤매고 있을 때에도 백성들의 민심 이반으로부터 유방을 탈출시킨 일도, 항우와의 최종 전쟁에서도 그 유명한 ‘사면초가’ 전략을 기가 막히게 구사함으로써 상대방의 심리를 크게 흔들어 결국 항우가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게 만든 일도, 천하통일 후 논공행상 시에 과거의 배신자(옹치)에게도 상을 주게 하여 반란의 여지를 완전히 없앤 일도, 유방 이후의 후계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아주 뛰어난 계책을 내어 놓아 피바람을 막아낸 일 또한 모두 장량의 탁월한 안목과 계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긴 안목과 계책을 지녀라(그림;.bing.com/images)


 넷째, 상대를 잘 인정하고, 또 알아보아 주어라. 

    

 상대가 아무리 밉더라도, 먼저 그 존재 자체는 당연하고 충분히 인정하여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대하고 바라보는 아주 기본적인 예의일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존재라는 것은, 아무리 모가 나고, 못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 존재의 존엄 외 가치와 쓰임새도 있을 것이니, 이를 잘 찾아내고, 또 마땅히 알아보아 주어라.

 그런데, 큰 안목 혹은 자기 내공이 큰 자만인 이를 잘 발견할 수 있음은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만큼 자기 내적 성장부터 크게 키워낼 수 있어야, 결국 이런 것들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 상대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느껴지더라도, 세상일은 오늘에 결코 머물러 있지 않고, 항상 변화무쌍하게 진화해 나감을 꼭 잘 감안하여야 한다.

 나중에 세월이 좀 더 흐르고, 여러 조건이나 환경 등이 바뀌게 되면,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느껴지던 사람의 쓸모가 점점 더 크게 보일 수 있다.

 때로는 그 쓸모와 잠재 능력 혹은 가치가 아주 보배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 프로 스포츠계에서도 보면, 덕장(德將)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덕(德)을 두루 많이 갖춘 장수라는 뜻으로, 보통 선수들 각자마다의 포지션별 가치, 향후 전략적 가치, 성장 측면의 가치 등을 두루 헤아려, 매 경기마다 잘 기용하여, 구단 전체의 성적을 최대로 잘 끌어올리는 감독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사실이지, 그 구체적인 실명은 거론하지 않겠지만, 어떤 감독은 과거 자신의 선수 시절의 자질이나 능력면에서는 타 선수들보다 그렇게 뛰어나지는 못했더라도, 감독 부임 후, 감독으로서 선수들의 잠재 능력이나 가치를 잘 알아보고, 재목으로 잘 길러내고, 적재적소에 잘 기용하기도 하여, 결국 훌륭한 실적을 내는 감독들이 적지 않음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설령 상대가 현재 매우 밉게 보이더라도, 좀 더 그 잠재적인 가능성을 잘 알아보고, 그래서 항상 이들에게 아량을 잘 베풀어 주려 하고, 현재의 다소 부족함은 기꺼이 참아줄 줄도 아는 그러한 여유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적어도 인간관계 측면에서는, 미래에 대한 당신의 아주 큰 투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나중에 언젠가는 당신에게 있어서 아주 보배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설령 그렇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과연 최악의 사이로 치닫게 하거나, 미움의 감정으로 서로의 감정을 마구 갉아먹거나, 오래 척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불상사라도 잘 막아줄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당신의 알량한 자존심이나 아무 투자 가치 없는 고집은 아예 과감히 던져 버리고서, 상대의 존재를 진정으로 한번 인정하고, 때로 잘 참아주기도 하고, 지긋이 때를 기다려 보아라. 

 상대가, 잘나 보여도, 못나 보여도, 상대를 디폴트로 도우려 하고,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스스로도 도울 수 있도록 해 보아라.

 그래서 진정, 사람에 대한 투자를 한번 제대로 해 보아라.

 아마 당신 주변을 잘만 들여다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물망(후보군)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다섯째, “완벽주의에 대한 경계”이다.     


 세상에는 결코 완벽한 것이 없고, 완전한 것 또한 절대 없는 편이다.

 그러니, 너무 상대에 대한 평가 기준을 높이 하여, 조금의 흠만 보여도 마구 미워하거나, 공격을 하려 해서는 절대 안 되겠다.

 간혹, 자신을 잘 성찰해 보면, 자기 자신 또한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아주 못난 구석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못난 존재가 상대를 자기보다 더 못난 존재라고 너무도 쉽게 판단하여, 마구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려하는 것은 자칫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격이 될 수도 있겠다.     

 

 결국 대인 관계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또한 “완벽주의에 대한 경계”라는 관점이다.

 사람에게는 그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결점이 있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어리석게도 잘못의 크고 작음을 그리 쉽게 ‘아전인수’ 격으로 따진다는 것은 너무나도 못나고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이렇게, 상대를 너무 쉽게 판단하고 마구 미워하려는 완벽주의에 대한 환상은 자신을 너무나도 잘 모르고 있다는 강한 증거일 수가 있을 것이니, 그 누구도 이를 잘 경계하여, 매사 아주 온당하고 공정한 판단을, 항상 정당하고 합리적 처사를 잘할 수 있어야 하겠다.     


 고금에 “춘풍추상”이란 말도 있지 않던가?


      “자신의 무슨 흠이나 부족함에 대해서는, 오히려 가을 서릿발처럼 엄격하고 차갑게 회초리를 들어야 하고, 타인에 대한 미움의 감정에 대해서는 결코 너무 쉽게 판단하여 주변에 노출시키지 말고, 봄날의 부드러운 바람을 대하듯 하여야 마땅하다.”

라고도 한번 해석해 볼 수 있겠다.           


"미움이라는 강한 독기!"(그림; drjeanetteraymond.com)



 결론적으로,     


 우리는, 상대에 대한 미움의 감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마땅히 지켜나가야 할 도리를 절대 헛갈려해서도 안 되고, 오히려 아주 철저히 구분을 하여, 미움의 감정은 미움대로 차분히 대처하고 완화시켜 나가려 해야 할 것이고, 마땅한 도리는 도리로서 제대로 대접하여 잘 행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방식으로, 미움의 감정을 바로 즉흥적인 보복이나 앙갚음의 심리로 이어 나가려 하지 않고, 도리로서 차분히 맞대응해 나가려 한다면, 그래서 서서히 그 해법을 잘 만들어 나간다면, 그 미움은 결코 네 마음을 마구 갉어먹지 못할 것이며, 더 이상의 강한 독성을 내뿜지도 못할 것이고, 서로의 상처를 더욱 깊게 만들거나 당신의 소중한 감정을 마구 소모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미움은 더 이상 그 미움으로서의 기세가 크게 꺾이게 될 것이고, 결국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나중에,

 그러한 미움은, 당신이 잘 다스린 만큼, 미움으로서의 독기가 어느덧 사라지고, 아주 순해질 것이며, 당신이 견지한 ‘도리’의 힘에 못 이겨, 결국은 당신의 든든한 우군 내지는 지원군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 어느 순간에나, 미우나 고우나 항상, 세상 사는 ‘도리’에 경외해야 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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