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나리오 작법을 무료로 배우는 법

허술함 주의

by 다롬
그래. 시나리오를 써보자!


글쓰기 독학 n개월 차. 매달 다른 공모전에 매번 다른 작품을 제출하기 위해 마감 중독자처럼 내달리던 어느 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시나리오 공모전'을 클릭하게 된다. 애초에 시나리오가 무언지도 정확히 모르는 무지랭이였지만, '몰라. 일단 해.' 정신으로 도전을 결심한다.



하지만 에세이, 여행기, 소설과는 달리 시작부터 단단한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건 바로, '시나리오는 일정한 형식이 있기에 우선 작법을 배워야 한다'는 온라인 멘토들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그래서 시나리오 쓰는 법을 검색하면 최상단을 메우고 있는 대다수가 광고였다.



'시나리오 작법 강의'



수강료는 비쌌다. 해외에 사는 나로서는 직접 가서 듣지도 못하는데, 그 돈을 내고 온라인 강의를 듣기에는 무언가 아까운 감이 없잖아 있었고, 당시 남편 외벌이를 시키고 있던 나는 그가 매일 힘들게 벌어오는 돈을 공연히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장편 소설 때처럼, 나는 시나리오도 독학을 결심하게 된다.






pexels-ron-lach-7983347.jpg 출처 : Pexels



그리고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발견한 건, 도전할 공모전 홈페이지에 무료로 공유되어 있는 온전한 형식의 영화 시나리오 파일이었다. 대충 검색해서 '정의'와 매우 간단한 '예시'만 봤던 나는 도통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뭣도 모르고 그 파일을 열어 후루룩 스캔하듯 읽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장면, 인트로 넣는 법, 현재형으로 쓰는 지문, 날것의 대사, 각 인물의 첫 등장 표시, 장면 속 혹은 사이사이 적혀있는 시나리오 용어들···.



아. 유레카! 그저 막막하기만 했던 느낌이 탁, 하고 풀리고 또 탁, 하고 반짝 빛이 드는 기분. 그래도 살면서 제법 접했던 에세이, 소설 등은 '형식'에 대해 갸웃하지는 않았는데, 생전 처음 마주한 이 시나리오라는 것은 일단 그 형식부터가 문제였다. 그런데 이렇게 딱 예시가 있다니, 심지어 전년도 공모전 당선작들이니까 신뢰도도 몹시 높았다. 그래, 이거야. 이거 보고 형식을 익히면 돼. 그러면 독학이 가능해. 희망이 피어올랐다.



몇 페이지만 보고서도 내게는 강한 끌림이 솟았다. 곧장 바탕화면에 새 폴더를 만들어 그 이름을 '시나리오 참고'로 지정한 뒤, 공모전 주최사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는 영화와 단막극 몇 개 파일을 다운 받아 저장했다. 이제 그 폴더는, 내 시나리오 작법 강의 선생님과도 다름없었다. 그렇게 나는 무료 멘토를 구한 것이었다.



전년도 당선작 파일과 한글을 함께 띄워놓고, 번갈아가며 한 땀 한 땀 장면을 만들어갔다. 씬넘버 쓰는 법도 몰랐지만 여러 개의 예시 파일을 비교하며 나만의 넘버링을 새겼다.



S#1. 2학년 교무실/oo고등학교(낮)



첫 장면과 함께 나의 첫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








나 같은 생초보자도 명확히 알아볼 수 있는 시나리오 작법의 몇 가지 특징은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이것이었다.



지문은 현재형으로, 간단히


시나리오는 크게 '지문'과 '대사'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중 지문은 장면의 배경, 분위기나 상황, 인물의 표정이나 행동 등을 설명하는 글이다.



S#1. 2학년 교무실/oo고등학교(낮)
철수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안으로 걸어가며 청소 중이던 영희와 눈이 마주치고, 철수는 고개를 홱 돌리며 먼저 시선을 피한다.



지문을 읽는데, 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하며 쓰읍-의문을 품은 입소리를 냈다.



'뭐지, 이거?'



현재형에다가, 그냥 문장이었다. '나는 밥을 먹는다'와 같은 그냥, 현재형 문장.



항상 문장과 문체에 신경을 써야 했던 에세이, 소설만 써 온 나는 당황했다. 이거, 그냥 쓰라고? 철수가 영희를 만나는데 곧이곧대로, 직설적으로 그냥 쓰라고? 심지어 만'났'다, 도 아니고, 아무런 묘사도 없이 그냥, '철수가 영희를 만난다', 이렇게 띡?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애초에 극본이라는 건, '배우' 혹은 '연출가'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연기해야 하고 어떻게 장면을 구성해야 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글이 아닌가. 고로 쓸데없는 묘사나 감정 표현은 들어가지 않는 게 맞다는 말이다. 현재형으로 심플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베스트였다.



그러나 역시 어색했다.



어색하긴 한데, 동시에 편했다. 아, 그냥 철수가 영희를 만나면, 만난다고 쓰면 되는구나. 둘이 시선을 맞춘다 하면, 그냥 눈을 마주 본다고 쓰면 되는구나. 한 문단 안에 겹치는 단어나 표현도, 그 상황에 맞는 감정이나 분위기를 잘 담아낸 아름다운 서술적 묘사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고로, 매우 편했다.



아아. 나는 벌써 시나리오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지문 아래에는 이제 대사인데,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원래도 '대사'를 무척 좋아했다. 정확히는 대사 쓰는 구간을 그 어느 부분보다 선호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내 글을 읽고 피드백해주는 남편 역시 유독 그것을 칭찬했다.



"내가 볼 때, 넌 대사를 잘 써. 으음, 맛있어."



혹시 칭찬할 곳이 없어서 그나마 눈에 잘 띄는 대사를 언급한 것일지는 사실 모르겠으나 뭐, 어쨌든. 대사를 잘 쓰는 건 내 남편의 매우 주관적인 의견이라 치더라도, 일단 나부터가 대사를 쓰는 걸 몹시 좋아했다. 대사를 쓰고 싶어서 소설 하나를 완성하려는 정도랄까. 그만큼 독백이든 주고받는 티키타카든 인물들의 대사를 중시하고, 애정하며 또 집착을 두는 편이었다. 그래서 지문과는 달리 대사에서는 딱히 당황하지 않고, 그저 'Tab'을 이용한 가독성 좋은 대사 작성 형식을 익힌 뒤 쭉쭉 써내려갔다.



pexels-ron-lach-7968074.jpg 출처 : Pexels



60-70분 단막극 분량 : A4 35매 내외
100분 극영화 분량 : A4 80-100매 내외



공모전 요강에 나와있는 일반적인 분량을 채워갔다. 35매 하나를 쓰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야기만 있다면야 3, 4일 정도 걸릴까. 문장력에 대해 머리를 싸매지 않아도 되니 나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더욱 편하게 춤을 췄다.



그렇게 단막극 몇 개, 영화 몇 개를 완성해 가면서 각각 분량에는 보통 몇 개의 씬이 나오는지, 보통 한 장면의 길이는 얼마 정도인지 등등에 대한 감을 대략적으로나마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시나리오 폴더 속 '영화', '단막극' 작은 폴더를 차곡차곡 채워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온라인 멘토인 '시나리오 참고' 파일을 열지 않게 되었다. 간혹 '그런 장면 전환 기법을 쓰고 싶은데, 그걸 뭐라 그러지?' 머릿속에 물음이 뜨면 일단 인터넷에 먼저 검색을 한 뒤, 특정 용어를 찾으면 이게 어떻게 쓰이는지 몰라 가끔 다시 참고 폴더를 열었을 뿐.



본격적인 강의나 책이 아닌, 예전 당선작을 보며 한 시나리오 작법 공부. 이건 어찌 보면 무척이나 위험하고 허술하며 결국은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나처럼 아예 처음 시도하거나, 처음이니 굳이 냅다 돈부터 쓰고 싶지 않다거나, 독학할 의지가 있는 초보 작가지망생이라면 나름 추천하고 싶은 방법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시나리오 쓰기는 무척이나 재밌다는 사실! '아우. 못해, 못해.' 절대 부술 수 없을 것 같던 장벽을 무한한 열정과 의지가 깃든 망치로 깨부수고, 홀로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고 씨름하며 70개의 씬, 100개의 씬, 많게는 130개의 씬을 만들었다. 나의 글세계에 '시나리오'라는 새로운 영역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keyword
이전 07화독학으로 시나리오 쓰기, 가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