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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만 쓰다 처음으로 '장편 소설'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인 나. 시작부터 일단 막막했다. 원고지 80매 내외만 후루룩 쓰다가 냅다 원고지 500매, 600매를 쓰려고 하니 당연 그럴 수밖에.
그러나 내가 누군가. '몰라. 일단 해.' 마인드로 이 정신없는 인생을 이끌어온 인간. 내 삶의 모든 가시적인 성취는 늘 고된 과정과 그에 합당하는 시간이 들었다. 그러니 이 장편소설이라는 것 역시 그럴 것이었다. 키보드 위에서 곧게 핀 열 개의 손끝에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얼마의 각오를 달고 일단 시작했다
일단 시작을 하고 싶은데, 나는 도저히 뭘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소 익숙한 에세이는 그저 내 이야기를 쓰면 되므로 소재 혹은 주제가 없어서 고민한 적은 없었는데, 소설은 A부터 Z까지, 그러니까 스토리의 뼈대부터 캐릭터, 대사, 플롯, 중간중간 촘촘한 디테일을 넣으며 완벽한 엔딩까지 오로지 내가 다 만들어내야 했다.
"음···."
빈 한글 페이지에서 깜빡거리는 커서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직 한 자도 쓰지 않아 놓고, 머릿속은 이미 몇 십장은 쓴 것처럼 희뿌연 안개가 끼었다. 막막하고 갑갑하고. 이거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맨땅에 헤딩을 하는 기분이었다.
'무슨 소설을 써야 하는가'
그래서 무작정 검색했다. 딱 저렇게 쳤다. 그때 나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한 단 한 줄이었다. 그랬더니 초록창 카페였나, 블로그였나. 출처는 선명하지 않지만 나의 막막함을 비집고 들어온 답변이 하나 있었다.
내 이야기를 쓰세요.
나는 갸웃했다. 내 이야기? 그건 에세이 아닌가? 그 답변의 골자는 이러했다. 소설도 글이고, 어차피 내가 잘 아는 것을 쓸 때 가장 빛이 난다. 고로, 작가의 이야기나, 직접 겪은 일이나, 어쨌든 남들과는 차별화될 수 있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끌어와서 소설로 만들어라. 그게 시작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의 조언은 분명 나처럼 처음 '소설'이라는 장르에 발을 들인 초보자들이 대상 타겟이었다. 소재가 없고, 쓸 거리가 없고, 대체 이런 게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한없이 막막함을 느끼는 건 아무래도 기성 작가보다는 신인이나 지망생의 비율이 클 테니.
나는 랜선 조언을 깊이 새기며 노트북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별안간 내 인생을 되새겼다. 나는 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나에게는 있고, 남들에게는 없을만한 경험이 있는가. 하나의 주제로 이어질 수 있는 커다랗고 반짝이는 구슬이 있는가.
하얀 메모장을 바라보며 30년 인생을 더듬어가는데 순간, 머릿속을 번쩍 스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수험생'
10대에는 대입, 20대에는 공무원, 30대에는 이 지금, 작가지망생. 나는 수험생의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것도 아주 열심히. 펑펑 놀다가 고2 때부터 미친 듯이 몰입하여 1지망 대학에 합격했고, 공부하기 싫어 죽겠어서 매일 저녁마다 맥주를 그렇게 마시면서도 끝내 공무원이 되었고, 그렇게 방황을 일삼다 30대에는 또 다른 꿈을 찾아 지망생, 즉 다시 수험생이 되었다.
시험과 성장이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 특성상 나와 같은 인생길을 걸어온 이들이 적진 않겠지만 나는 어쨌든 나만의 이야기를, 조금 더 특별하게 쓸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았다. 소재도 그렇고, 주제도 그렇고. 소재 요정이 찾아오자 내 손가락에 곧장 힘이 들어갔다. 영원히 공백으로 남을 것 같던 한글 빈 페이지가 검은 글자로 빡빡하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후.
1장, 2장, 3장 중 3장의 마무리 부분을 쓸 때 즈음이었다. 종일 노트북을 붙잡고 있다 보니 눈은 유난히 뻑뻑했고, 그 피로는 전신으로 퍼져 매일매일이 파김치였다. 시들시들, 비틀비틀. 본격적인 작가지망생이 되기 전 내가 상상했던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타닥타닥 글을 쓰는' 작가들의 평화로운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양상이었다.
몹시 지치고 지쳤지만, 원고지 매수가 늘어가고, 만족스러운 장면이 늘어감에 따라 막 희열이 일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술 마시고 오르는 취기, 그런 인위적인 희열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쾌락이었다. 자는 시간, 쉬는 시간을 줄이고 습관적으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일부러 작정하고 여유시간을 줄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내가 그러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남편과의 저녁 산책은 빼먹지 않았다. 매일매일, 나는 같은 얘기만 반복했다. 소설, 주연, 구성, 결말 등등. 글을 쓰지 않는 남편은 정말 하등 관심도 없는 주제들일 텐데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리고 신기해했다.
"너 이렇게 신나 하는 거, 진짜 오랜만에 본다."
재밌나 보네? 남편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머리 안 감았는데 왜 만지냐며 나는 포효하는 사자처럼 갈기를 부르르 털어내 그의 손을 떼어내고, 다시 조잘조잘 그놈의 소설에 대해 떠들어댔다. 무한반복이었다.
아, 나 진짜, 정말
마지막 문장 딱! 쓰면
너어무 너무 시원할 것 같아.
그로부터 얼마 뒤,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을 썼다. 너어무 너무 시원했다. 진짜 다 썼나? 내가 500매를 완성했나? 시원하긴 한데 실감이 나지 않아 1페이지부터 80페이지까지 스캔하듯 마우스 휠을 빠르게 굴렸다. 내가 이 많은 글을 썼다고? 진짜? 몇 번이나 더 왔다 갔다 한 후에야 나는 '완결'을 냈음을 제대로 인지했다.
그렇게 첫 장편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건 현재, 내 노트북 구석 깊숙이 박혀있다. 지금 그 원고를 열고 읽으면 아마 내 눈을 확 찔러버리고 싶지 않을까. 항마력이 딸려서 도저히 첫 몇 페이지조차 읽지 못하고 덮을 것이고. 그만큼 엉성하고, 구성은 괴이하고, 일기인지 뭔지 구분이 안 가는 가벼운 문체와 문장은 말할 것도 없으며 그냥 아주 엉망진창 집합소다.
결국 소설이라기보다는 그저 에세이에 가까운 글이 되었다. 그래서 차마 '소설'이라는 꼬리를 붙이지 못하고 그냥 '첫 장편'이라 부른다. 나 스스로도. 공모전과 투고 모두 시도했지만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다. 당시의 나는 왜인지 이해를 못 했지만, 이미 여러 편의 다른 소설을 쓴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애초에 남들에게 보여줘서도 안 되었던 원고의 수준이라는 것을. '첫 술에 배부르랴'라는 격언을 끌고 와서 합리화를 할 수도 없을 만큼의 낮은 수준이랄까.
이 글을 쓰며 잠깐 보려고 '수험생.hwp' 파일을 열었는데, 눈을 질끈 감고 얼른 꺼버렸다. 이걸 글이라고 썼어? 똥 아니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게 되는, 몹시도 창피한 글이다.
하지만 '원고의 질'이 어떻든, 일단 결말을 냈다. 1페이지부터 80페이지까지, 원고지 1매부터 500매에 이르는 한 편의 글을 썼다.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결을 내린 것, 그건 내게 아주 큰 경험이자 자산이 되었다.
기본 플롯 짜기, 캐릭터 주조연들의 외모, 성격, 말투 구성 및 디테일 세분화, 반전이나 흐름에 대한 힌트 등 흥미 유발 요소 삽입, 같은 단어나 같은 문장이 겹치지 않게끔 애를 쓰는 노력. 머리를 싸매고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리며 종일 노트북 모니터와 씨름하던 그 지난한 날들.
오직 나 혼자서, 내 머리만으로 500매라는 하나의 소설을,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경험. 결코 해내지 못할 것 같던 일을 완성하며 뿌듯함이 얹어진 자신감이 붙었을뿐더러, '과연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얼핏 찾은 것도 같았다.
나는 바로 다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소재 요정이 어렵지 않게 나를 찾아왔다. 한번 시작하고, 한번 완결을 내니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쓰고, 쓰고, 또 썼다. 이상하게 체력은 빠지고 몸은 지치는데, 정신과 눈빛은 또렷해져만 갔다.
저녁마다 남편의 손을 잡고 오로지 '소설'에 대해 얘기했다. 남편이 자기 얘기를 해도 나는 집중하지 못했다. 오로지 내 머릿속을 차지할 수 있는 건 '소설, 원고, 사건, 주연, 결말' 뿐이었으니까. 내가 그렇듯 남편 역시 "근데 여주 성격을 좀 세게 만들까? 사투리 쓰면 어때."와 같은 내 말은 한 귀로 흘리고 저가 좋아하는 일, 데이터 분석 등만 생각했겠다. 산책이몽이었다.
한번 완결의 희열을 느끼니, 나는 멈출 줄 몰랐다. 자의로는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는 폭주기관차였다. 그렇게 쓰고, 쓰고, 또 썼다. 두 번째는 500매, 세 번째 900매, 네 번째 600매, 다섯 번째 700매···. 매달 몇 개씩 있는 장편소설 공모전에 매번 다른 작품을 제출하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달렸다.
그렇게 주야장천 소설만 쓰던 어느 날, 나는 새로운 공모전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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