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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일단 단편으로 시작해본다

소설 쓰기는 처음입니다만!

by 다롬

"다희! 소설을 써보는 게 어때?"



줄곧 에세이, 여행기, 블로그, 브런치만 쓰던 나는 어느날 주어진 남편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거의 읽지도 않는 '소설'이라는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시작은 짧은 글이었다. 즉, 단편 소설.



시작은 했는데, 나는 '내가 소설이라는 걸 쓰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쩐지 민망하고, 약간은 죄스럽기까지 한 탓에 늘 말을 얼버무리곤 했다. 저녁 산책에서 남편이 "오늘은 잘 썼어? 뭐 썼어." 라고 물으면 나는 우물거리며 "그냥 비슷한 거 썼지, 뭐." 라고 답하는 식이었다.



제대로 한번 글을 써보기로 했으니, 나는 나만의 데드라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공모전' 마감일을 기준으로 잡기로 했다. 웬만한 소설 공모전의 요강에 따르면, 단편 소설은 보통 '원고지 70매-100매 내외'였다. 나는 갸웃했다. 원고지 매수? 이전까지는 원고지 매수 확인 방법조차 몰랐던 나였다.



제주 여행 중, 도서관에서 찾은 나의 책 :)



에세이 원고를 쓸 때는 투고용이었기에 A4 몇 페이지, 이런식으로만 계산했다. 나 글을 100페이지나 썼어! 이게 진짜 책이 될 수 있을까? 그저 설레하며 '원고 분량: A4 100페이지' 이런식으로 출간기획서에 적어서 출판사에 투고했다. 이 문학의 세계에 대해 그야말로 아는 것이라고는 없는 무지랭이였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원고를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내주신 출판사에 무한한 감사를...)



'한글 원고지 매수 확인하는 법'



이젠 단단히 준비된 작가지망생이 되겠다는 일념 하에 간단히 검색으로 알아냈고, 한 문단, 두 문단 쓸 때마다 득달같이 한글 '문서 통계' 탭으로 들어가 원고지 매수를 체크하는 열정을 보였다. 글자 크기 11포인트, 줄 간격 160%로 하고 몇 개의 단편을 완성하다보니 얼추 파악이 가능했다.



원고지 70매-100매는 한글 A4로 따지자면 대략 12-18페이지.



그래서 2번째, 3번째 원고부터는 굳이 원고지 매수를 5분마다 확인하지 않고 대충 남은 분량을 가늠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타닥타닥, 키보드 위에서 내 손가락이 신명난 춤을 추며 글자가 한가득 채워졌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었다.



'아니, 내가 있었던 내 일을 쓰는 에세이도 아니고,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스스로 막 지어내는데, 그걸로 과연 원고지 70매 분량을 맞출 수 있을까? 너무 길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나의 상상력에 한계가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 한계도 남들보다 훨씬 짧을 것이라 여겼다. 여태 써 온 글이라고는 오로지 내가 겪은 일을 기록하는 형식뿐이었기에 나의 그러한 의심은 마땅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분량을 다 채울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은 기우였다. 그것도 아주 명백한 기우. 생각보다 70매는 금방 채워졌고, 그 안에서 기승전결은 물론 세세한 감정선의 시작과 끝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야 하니 외려 '벌써 다 찼어? 아직 쓸 거 많은데...? 이거 왜 이렇게 분량이 작아.' 라며 혀를 차기 시작했다. 내외는 플러스 마이너스 10프로까지라 했다. 그래서 결국 '70매 내외'로 쓴 원고들은 77매로, '100매 내외'로 쓴 원고들은 대게 110매 정도로 꽉 채워졌다.



몇 편 쓰고 나서 깨달았다. 단편 소설은 한정된 분량 안에서 얼마나 알찬 구성을 해내는지의 싸움이라는 것을. 한두개의 메인 사건을 중심으로 그를 이루는 딱 맞는 장면들과 대사들과 인물들의 감정선들을 얼마나 예쁘게 처리하느냐의 싸움이라는 것을.



소설, 단편 소설이라는 걸 인생 최초로 완성하면서 나는 벌써 무언가가 된 느낌을 받았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고, 그저 내 노트북에만 저장된 원고지만 그걸 쓰는 과정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몇 단게 성장하거나 발전했다는 그런 묘한 기분이 들었달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걸 완성은 했는데 '잘' 혹은 '맞게' 쓴 건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재밌다'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쓴 이 글을 마땅히 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지, 그 정도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문제는, 이걸 보여줄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일단 주변에 아는 작가가 없고, 글쓰는 이도 전무하며, 심지어 해외에 살고 있어서 어디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모임 따위도 없었다. 사실, 아는 작가님이 계시고, 참여 가능한 모임이 있었더래도 나의 이 샤이한 성격 상 절대 보여줄 수 없었겠지만. 기회가 주어져도 나라는 인간은 결코 '합평'이라는 건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



10년 간 볼꼴 못 볼꼴 다 보여주며 살을 부대껴 온 남자, 나의 남편. 그가 보지 못한 내 모습은 없고, 그가 알지 못하는 나의 다른 면도 없고. 나 역시 남편 앞에서는 못 보여줄 모습도, 못 보여줄 글도 없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보여줬다. 남편은 안경을 고쳐쓰고 곧장 진지한 독서 모드로 돌입했다.



에세이도 아니고, 내가 나름 진지하게 쓴 '단편 소설'이라는 걸 누군가가 읽고 있다니. 두근두근했다. 그 '두근두근'에는 설렘도 긴장도 걱정과 막연한 기대 모두 포함이었다.



나는 계속 남편을 흘끔거렸다. 그가 터치 패드 위에서 손가락을 놀리며 이따금씩 미간을 살짝 찌푸릴 때마다 나는 가슴이 덜컹거렸다. 이상한가? 역시 이건, 글도 아닌가? 나는 혹시 글을 쓴다 해놓고 사실은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를 생산한 것일까. 쓰레기...혹은 똥?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꾸몄다. 그러나 역시 숨기지 못한 긴장은 땀이라는 형태로 변질되어 손바닥에 송글송글 맺혔다. 그리고 곧, 남편은 흐음-하는 입소리를 냈다. 나는 남편을 쳐다봤다.



"음. 다 읽었어."



꾸울-꺽. 무거운 침이 넘어가며 나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입안으로 넣었다 뺐다 깨물었다 훑었다 아주 혼자 요란을 떨었다. 어, 어때? 차마 말로는 못하고, 최초의 독자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발사했다.



"음, 아무래도..."

"으...으응..."

"계속 써. 너 이거 해. 계속."



어?



고개를 주억거리는 남편의 말에 나는 눈이 댕그래졌다.



"취업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이거 해."



당시 나는 1인분의 몫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계속 취업을 할까말까 어떤 일이라도 역시 해야할까 아닐까 한창 머리를 싸매던 시기였다. 비영어권 유럽에서 내가 할 수 있을 일이 과연 있겠냐마는, 안 되면 청소일이라도 구할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만큼 마음이 어두웠다.



"내가 볼 때, 너는 돼."



이 남자는 다정하고 상냥한 남편 그 자체지만, 언제나 이런 피드백에는 현실적이고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하다니. 내가 쓴 글을 보고! 취업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하다니.



아아.



나의 입꼬리가 주체를 못하고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헛기침 몇 번을 하며 피어오르는 미소를 애써 가다듬으며 물었다.



"재밌...어?"

"응. 재밌어. 좋아. 잘해. 너 잘 써."

"그냥 하는 말이지...?"



남편은 재차 말하며 제 의견을 확고히 했지만, 나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남편의 표정은 한결 더 단단해졌다.



"아니. 정말."

"..."

"그러니까 계속 해."



그러니까 계속 해.

그러니까 계속 해.



남편의 첫 피드백이었던 이 말은, 앞으로 내가 겪게 될 지난한 과정을 버티게 한 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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