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긴 천재들만의 리그가 아니냐고!
소설
장편소설
그냥 소설
이 단어들을 보면 저마다 떠오르는 감상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아주 대단히 거대한 '벽'이었다. 크고 높은 장벽 혹은 목을 뒤로 한참 꺾어도 그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거목 같아서 내가 절대 오르지도 넘어서지도 못하리라 확신하며 고개를 얕게 주억거리는 그런 느낌.
그러니까 '이제 진짜 작가가 되어보자!'라는 거창한 의지로 나 스스로를 똘똘 휘감은 후에도 나는 그런 생각이었다. 아, 나는 장편은 못 쓸 거야. 단편까지는 어찌저찌 얼레벌레 후루룩휘리릭 쓰긴 썼는데, 아무래도 장편은 무리지. 일단 너무 길잖아. 그런 건, 약간 타고난 천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하긴 해야 했다. 아무도 나를 통제해주지 않는 비회사원의 하루. 나라도 나를 강하게 채찍질하고 엄하게 관리하고자 데드라인을 만들었는데, 그 기준은 공모전이었다. 그리고 이렇다 할 문학 공모전은 대부분 '원고지 500매-600매 이상의 중장편'을 받았다. 그건 곧, 최초의 결심인 '글로 먹고살아보자'를 달성하려면, 아니, 그 근처에서 서성거리기라도 하려면 원고지 80매의 단편만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장편 소설'이라는 세계가 나 같은 이를 받아줄지는 미지수였다.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해보지도 않았는데 무슨 벽이 높고, 못 오를 나무인가? 단편에서 장편으로 넘어가는 허들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다던 그 막연한 두려움은 아마 내가 지레 겁부터 먹은 탓이었겠다.
그래서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그건 바로, 여태 삶을 대해 온 나의 일관된 정신머리였다.
몰라. 일단 해.
과연 할 수 있을까, 안개라도 낀 듯 희뿌연 의심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였다. 그냥 하는 것. 일단 해보는 것. 이게 될까? 할 수 있을까? 주야장천 고민만 하다가 결국 어영부영 흘려보내지 않고 무작정 시작하는 것.
실패할까봐 겁나? 결국 포기할까봐 무서워? 그래서 뭐 어쩔 거야. 안 할 거야? 자문을 해보면 곧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은 명확했다. 그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냥 해. 일단 해. 별 수 없지 뭐 어쩌겠어.
무계획, 충동적, 철부지, 무모함, 제멋대로인 나의 고질적인 성격은 안정적인 인생을 일구는 데는 최악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반짝, 빛을 발했다. 원하는 일을 찾아 무작정 퇴사하는 것, 원하는 삶의 모양을 찾아 무작정 해외로 나는 것,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과 공유하고자 무작정 에세이를 써보는 것.
그 모든 '무작정'과 '일단 해'가 내 삶의 전반을 끌어왔다. 내 인생 대부분의 확실한 순간들과 성취들을 가져오고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그러니 이것도 그럴 것이다.
살면서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 장편소설이라는 걸 무작정 써보는 것. 일단 해보는 것. 누구라도 읽는 글이 되든 그저 내 노트북 속에서 푹 익어가기만 할 원고가 되든,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시작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키보드 위에 양손을 조심스레 올렸다. 바탕화면에 있는 '소설' 폴더를 클릭했다. 거기에는 가지런히 정렬된 원고들이 있었다. 원고지 100매가 최대인 단편들이었다. 나는 이내 '새로 만들기'로 폴더를 하나 만들고, 이름을 '단편'으로 지었다. 그리고 개별 원고 파일들을 모조리 그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폴더를 하나 더 생성했다. 그 폴더의 이름은 '장편'이 되었다.
한글 새 파일을 열고, 타닥타닥,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일단 쓰기 시작한 내 첫 장편 소설의 시작이었다.
이때의 나는 몰랐다.
글쓰기 독학 1년 만에, 일단 시작한 장편 소설로 공모전 최종심에 오를 줄은, 정말 이때의 나는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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