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대표님이 궁금합니다.

[D-344] 백곰세탁소

by Mooon

D-344. Sentence

백곰세탁소

@삼척 백곰세탁소

한 장의 종이에서 시작된 따뜻함이 하루의 온도를 더 온화하게 만들었다. 오늘 내가 삼척에서 가장 오래 바라본 풍경은 바다도, 해변산책로도 아니었다. 백곰세탁소 앞, “아빠가 아파 당분간 쉽니다”라고 적힌 오래된 달력지 한 장.그 문장이 묘하게 마음을 붙잡았다.


오늘로 삼척을 열한 번째 찾았다. 두 달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가 아닌 없는 시간을 만들어 내려왔다. 어젯밤 삼척에 도착해 숙소에서 새벽까지 제안서를 고치며 노트북을 붙들고 있었다. 오후에 예정된 미팅도 원래는 센터장님과의 자리였지만 결국 팀장님과 진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많은 날이었지만, 그마저도 자연스레 받아들일 만큼 지역과 일에 천천히 익숙해지는 과정인 것 같다.


미팅 전, 숙소 근처에서 눈여겨두었던 음식점을 찾았다.배가 고프지 않다며 큰 기대 없이 들어갔는데 육회비빔밥, 멍게비빔밥, 물회가 나오자 말이 무색해질 만큼 두 눈이 번쩍 뜨이고 마음까지 채워졌다. ‘역시 지역의 맛은 아무 준비 없이 다가와 더 깊게 스며든다’는 걸 또 한 번 느낀 점심이었다.


식당을 나오고 동네길을 걷던 중, 어느 세탁소의 손글씨 메모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두꺼운 옛날 달력 종이에 정성스럽게 적힌 글씨. ‘아빠가 아프셔서 당분간 쉽니다.’ 특별할 것 없는 문장이었지만 이 지역의 결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정직함, 멈춰있어도 괜찮다는 여유, 사람이 먼저라는 다정함. 어쩐지 그 문장 하나가 삼척이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오전의 바닷풍경보다, 덕산해변을 걷던 순간보다, 그 종이 한 장이 오늘 가장 선명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서울 집에 도착하자 어느새 밤이었다. 가평휴게소에서 제일 좋아하는 호두과자를 먹고 싶었는데 기계 고장으로 갓 구워진 아이를 살 수 없었다는 작은 아쉬움도 남았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제안한 사업이 잘 실현되어 조만간 가평휴게소에 들러 따끈한 호두과자를 꼭 먹게 될 것이라는 그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겼다.


두 달간의 지역조사도 이제 마무리되었다. 삼척과 도계를 오가며 느꼈던 따뜻함, 백곰세탁소의 메모 같은 마음이 우리 가족에게도, 나에게도, 우리 아이들에게도

스며들어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남는다. 오늘도 그저 보통날이었지만, 그 보통 속에 깊은 온기가 있었다.


내 안의 한 줄

하나의 메세지가 마음의 온도를 바꾼다.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

keyword
이전 14화사춘기 아들도, 사춘기 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