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45] 암호 재설정
D-345. Sentence
암호 재설정
정말 세상일은 모를 일이다. 예측불가 인생. 오늘은 아침부터 멘붕의 멘붕이였다.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달려드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그 난감함. 11시반 수업이 있었고, 9시 30분에 학교에 도착해 오늘수업 준비를 위해 교강사실에서 노트북을 켰다. 평소 때와 같이 비밀번호를 입력했는데 틀렸단다. 익숙한 손가락 동선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그 당황스러움. 계속 틀렸다고 말하는 노트북은 결국 5분 후, 10분 후를 외치다 1시간 후, 3시간 후 다시 시도해보라는 메세지가 떴다. 아풀사. 오늘 수업은 어쩌지. 오늘 해야할 일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말 누가 제 머릿속에서 전원코드를 쓱 뽑아버린 것처럼. 그리고 재빠르게 강의실 교탁컴퓨터로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 문을 여는 순간. 책상은 벽쪽으로 다 미뤄져있었고, 강의실 중앙에 의자들이 원형으로 놓여져있었다. 강의실을 썼으면 원래대로 해놔야지 오늘 왜이러지 정말.이라는 생각으로 혼자 책상과 의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혼자 바쁘게 움직이며. 열심히 다 옮기고 이제 교탁컴퓨터를 켜려는데 조교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오늘 누드드로잉..이라는 말을 떼시는 순간. 아풀사. 지난주 드로잉수업때문에 강의실 변경을 부탁했던 상황이 생각났다. 드로잉수업을 위해 배치가 달라져있었구나. 순간 계속 죄송하다 외치며, 다시 책상과 의자를 아까 위치로 되돌려놓았다. 오늘 내 팔과 다리는 그야말로 급 활동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변경된 강의실로 달려와 교탁 컴퓨터에서 수업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수업시간이 되었고, 3시간이 지나 노트북 비밀번호를 칠 수 있는 화면이 나와 다시 조심스럽게 비밀번호를 쳤지만…노트북은 8시간 후 다시 시도하라는 멘트가 떴다. 이쯤 되면 노트북이 나에게 감정 있나 싶을 정도. 오늘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는지. 결국 애플센터를 가야하나. 내일은 수업이 있으니 금요일에 가야하는데 그럼 내일 수업은 16인치짜리 돌덩이같은 맥북프로를 들고 학교에 가야하나. 이미 고장난 나의 어깨는 어쩐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ChatGPT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사진 하나하나를 찍어서 계속 물어보며 상황을 풀어다가다 결국 비밀번호를 다시 설정할 수 있는 화면까지 왔고, 오후 3시가 넘어서 노트북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되었다. 스스로 기특해하며, 나 혼자 ‘기술 생존기’를 치른 듯한 묘한 승리감도 살짝 들었다.
나의 무식함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암호에 대한 나의 기억력은 정말 최악이다. 암호가 필요한 온갖 상황에서 암호를 기억하지못해 난관에 부딪힌 적이 한두번이 아니니까. 왜 갑자기 수시로 입력하는 노트북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이런 일까지 겪어야하는 것인지 나 자신이 참 한심해보이지만. 어쩌겠나. 이게 나인 것을. 어쩌면 나의 뇌는 ‘기억 저장소’는 깔끔하게 포기한 건지도 모른다. 오늘 수업시간에도 뽀로로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결국 학생들에게 파란색 몸을 가진 머리 큰 캐릭터라 설명하고 말았다. 애니메이션까지 설명하며 헤매는 나를 보고 학생들이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횟집에 가서 스키다시로 나온 미역국을 보고, 미역국을 주문했는지 질문하는 내가 나인것을. 암호대신 나 자신을 재설정하고싶은 마음이다. 재설정하려면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인데 요즘 나 자신을 인정해가는 과정 중인듯하다. 노트북도 내 마음도 다시 리셋하고 다시 시작해보자. 어쨌든 노트북이 다시 열렸다. 그럼 된거지. 뭐. 결국 오늘도 ‘큰일 날 뻔’한 하루를 어떻게든 수습한 나를, 살짝 토닥여주고 싶다.
내 안의 한 줄
암호보다 훨씬 복잡한 나를, 천천히 리셋해본 하루.
매일의 감정이, 나를 설명할 언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