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보다 질, 그 불변의 진리에 관하여
아이를 임신한 뒤, 아직 자녀가 없는 유부녀 친구들과 육아 관련 이야기를 나누다 ‘워킹맘’에 대한 첨예한 입장차를 목격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논쟁이었는데, 맞벌이로 발생할 ‘양육자의 공백’을 떠올렸을 때 밀려오는 우려 내지 죄책감의 정도가 개인의 경험에 따라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외벌이 가정에서 어머니의 돌봄 아래 성장한 친구는 아이가 하교했을 때 집이 비어있는 상황을 쉬이 상상하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집에 계시지 않으셨더라면 자신은 굉장히 엇나갔을지도 모른다며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가 혼자 보내게 될 시간을 걱정했다. 건실한 회사에 멀쩡히 재직 중이면서도, 향후 아이를 계획하기 위해서는 시간 운용이 더 자유로운 직장을 찾아 이직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이 깊어 보였다.
반면, 맞벌이 가정에서 자란 친구는 아이가 혼자 보낼 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학업뿐 아니라 교우 관계 형성에 학원이 필수인만큼, 막상 그 시기가 닥쳤을 때 아이가 혼자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라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과거 자신은 그렇게 주어진 자유 덕분에 시간을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이 배양되었다며 앞서 언급된 다른 친구의 걱정을 기우라 일축했다.
우리 어머니는 정확히 두 가지 케이스의 중간 지점에 머무르셨는데, 집에서 공부방을 운영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 졸업 직후부터 학원 강사와 과외 일을 병행하며 상당히 좋은 수입을 올리셨던 어머니는 내가 태어남과 동시에 모든 일을 그만두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주 극악무도한 ‘엄마 껌딱지’였던 탓이다.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남들은 물론이고 아버지에게도 낯을 가리는 강력한 엄껌이었다. 당시 육아를 전담하시던 어머니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은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새벽을 틈타 목욕을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어머니의 부재를 귀신같이 눈치챈 내가 매번 종달기상을 해 울고 보챈 탓에 마음 편히 즐기실 수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내가 엄껌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즈음 공부방을 차리셨다. 아마 다시 방문과외나 학원 출강을 하자니 혼자 있을 내가 걱정되고, 경제 활동을 포기한 채 나만 바라보자니 수입이 아쉬우셨을 테다. 어머니는 집 문간의 마주 보는 두 방을 각각 교습실과 자습실로 꾸미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은 초등학생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나에게 어머니는 항상 집에 계시지만 동시에 계시지 않는 존재가 되어갔다.
당시 일상을 회상해 보자면 대강 이렇다. 하교 후 집에 돌아온 나는 곧바로 자습실로 향한다. 자리를 잡고 앉아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고 있다 보면 어느새 하나둘씩 도착한 친구들이 인사를 건네 온다. 반가운 마음에 속닥속닥 나누던 대화는 어느새 왁자지껄해지고, 도끼눈을 하신 어머니가 등장해 불호령을 내리고 나서야 자습실은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같이 혼났던 친구들과 함께 쭈뼛쭈뼛 교습실로 이동해 수업을 듣는다. 수업이 끝나면 드디어, 자유시간이다!
이처럼 전반적인 내 일과가 어머니의 관리하에 있다 보니, 나는 자유시간이 되기까지 길고도 긴(?)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만 했다. 게다가 이토록 어렵게(??) 얻어낸 자유시간에도 한 가지 제약이 따랐는데, 바로 꼼짝없이 내 방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거실이나 자습실에서 노는 모습을 보이면 공부방 학생들의 학습에 해가 된다며 자유 시간에는 반드시 내 방에 있기를 당부하셨다. 보통의 집들이 그랬듯이, 우리 집 역시 거실에 TV가 있었기에 어머니의 당부를 순순히 이행하면서도 ‘이건 반쪽짜리 자유다!’라며 뾰로통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어머니께서 내린 특단의 조치는 공간적 제약뿐만이 아니었다. 공부방을 시작하심과 동시에,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내가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수강생 모두가 우리 모녀 관계를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물론 공부방은 일종의 사업장이었고, ‘엄마’는 지나치게 격의 없는 호칭이었기에 ‘선생님’이라는 새 호칭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으나, 어린 시절의 나로서는 서운한 마음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머니를 직접 불러야 하는 상황을 피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불가피한 상황에서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내 입에서는 부지불식간에 ‘엄마’라는 단어가 튀어나왔고, 그런 날은 어머니께 꼭 한소리를 듣곤 했다. 몇 개월이나 그랬을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나 역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졌다. 너무나도 쉽게 입에 익어버린 새 호칭. 나는 수업이 없는 날에도 종종 부주의하게 어머니를 ‘선생님’이라 불렀고,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내게 “선생님이 해줄게”와 같은 말실수를 하셨다. 우리 모녀는 서로의 불찰을 너그러이 이해했고, 사소한 말실수 따위를 일일이 바로잡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한 게 맞았을까? 글쎄, 모녀와 사제의 경계가 옅어질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끼곤 했으니 정직하지 못한 건 내 쪽이었다.
고학년이 되면서, 반말과 존댓말을 오가는 데에 피로감을 느낀 나는 평상시에도 부모님을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위 어른들은 나를 부모님께 공손하고 예의 바른 ‘유니콘 초딩’ 쯤으로 평가하는 것 같았지만 나의 속은 알게 모르게 곯고 있었다. 한 번 생겨버린 마음속 거리감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고,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집을 떠나 지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명분 하에 점점 부모님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그런 날 보며 어머니가 애달파하시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이다. 어쩌면, 내가 잔정 없는 못난 딸이 된 것은 이때부터가 아니었을까.
부모로부터 오는 안정감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닌 정서적 교류를 기반으로 한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이 반드시 부모와 자녀를 긴밀히 연결시켜 주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나도 언젠가 워킹맘이 될 운명인지라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부족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긴지'가 아닌 '얼마나 알차게 채워지는지'임을 계속해서 되새기려 한다. 그러고 나서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리라.
본가에는 아직도 어머니께서 공부방을 운영하셨던 흔적이 가득 남아있다. 현관문 바깥면에는 공부방 간판이 붙어있고, 자습실(이었던 방)은 3면이 책으로 빽빽하다. 내 친구들은 아직도 “선생님 잘 계시지?”라는 질문으로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다. 어머니는 이제 흘러간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남겨진 공간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어머니가 스며있다. 문득 궁금하다. 미래의 나는 어떤 사람이, 또 어떤 엄마가 되어 오래도록 기억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