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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smilewriter Apr 24. 2024

보이스 10

노숙인


갑자기 한 달 전 서울 갔을 때 한 장면이 떠올랐다.
서울역에서 내리자마자 광장 쪽 보도블록 위에 꼬질꼬질한 이불이 펼쳐져 있고 이불 안에는 한 노숙인이 앉아있었다. 그 노숙인과 시선 마주칠까 봐 두려워 그들이 있던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지는 못했다. 이불 안 노숙인 옆에 약간의 공간이 있고 그 옆으로 쭉 이불의 행렬이 이어졌다. 한두 개의 원터치 텐트도 보였다. 형편이 좀 나은 노숙인은 텐트 안에 들어가서 겨울바람과 찬 공기, 서리 등을 피했으리라.
'아! 그들 세계에서도 빈부격차가 있었구나.'
11월 초 초 겨울 날씨는 무척 추웠다. 아라는 그날 추워서 가판대 상인에게 목도리를 세 개나 샀고, 추위를 피해 따뜻한 식당과 카페로 들어갔었다. 하지만 노숙인들은 이런 추위를 이불 하나로 온 밤을 버텼을 것이다. 지하철 통로를 걸어가면서 마음이 추워졌다.

오늘도 서울 지하철에서 걸어 다니는 아라에게 한 노숙인은 라면 먹으려는 데 돈이 모자란다며 몇백 원을 요구해 왔다. 아라는 약간의 돈을 그에게 주며 당부했다. 절대 술 사 먹지 말고 꼭 라면이나 식사할 만한 걸 드시라고. 아라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과 호의는 그것밖에 없었다.
영하 몇 도라고 옷깃을 여미고 두꺼운 패딩을 산다고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 많은 이들이 간다. 동시에 보도블록 위에 어디선가 구해온 이불 하나로 겨울 추위를 버티는 사람이 있다.
'임시보호소가 있겠지? 설마 역내에서 저분들 자는 건 아니겠지? 경찰에 연락해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진 아라는 지하철 내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
맨 끝 화장실 칸에 들어갔다. 변기 뚜껑이 덮여있다. 손을 뻗어 열려고 하는 순간 변기 위에 검은색 비닐봉지 한 묶음이 보인다. 좀 전 이 칸을 쓴 누군가가 두고 간 건가 싶어 급히 문을 열어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아무도 없다. 그리 멀리 가지 못했을 수도 있어 비닐봉지를 잡았다. 한 손으로 잡지 못할 정도로 두툼하다. 두 손으로 급히 낚아채듯 들었다. 묵직하다.
'이게 뭐지? 설마 돈인가? 지폐 모양 다발이 잡히는 듯한데 그래도 설마 돈이겠어? 에이 말도 안 되지. 중요한 거면 굳이 꺼내놓지 않았을 텐데 큰 묶음이 여기 왜 있을까?'
들고 화장실 밖 대기실로 뛰쳐나갔다. 사람이 거의 없다. 앉아서 쉴 수 있는 테이블 두 개에서 세 분의 노인들만 앉아 있다. 그중 여자분은 한 분이다.
"혹시 화장실에 이거 두고 가셨어요?"
아라는 들기도 무거운 비닐봉지를 들어 보였다.
가만히 고개를 흔드는 할머니는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 네. 알겠습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역무원 실을 바라봤다.
그런데 역무원 실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니, 사람이 왜 한 명도 없지? 지하철 승객에게 무슨 일 있나? 그래도 그렇지 한 명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도 없는 곳에 두고 오기가 그래서 들고 생각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그대로 두고 올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이거 두고 간 사람은 이유가 뭘까? 대체 왜? 큰돈을 지하철 화장실에 두고 어딜 간 걸까?'
비닐을 만지작거리다 화장실로 다시 들어갔다. 제일 끝 칸에 들어갔다.
'돈이겠지? 대체 얼마일까?'
호기심이 든 아라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연다. 5만 원 묶음들이 한가득 보인다. 대충 얼마인지 살펴본다. 얇은 묶음이 500만 원 정도로 보이니 얼핏 보아도 20묶음은 되어 보인다. 얼핏 봐도 1억 이상이다. 머리가 하얘진다. 가짜 돈인가 싶어 한 장을 꺼내 살펴본다. 불빛에 비춰도 본다. 예전 인터넷에서 위조화폐 감별법이라는 글을 본 기억을 되살려보며 살펴봤다. 위조가 아닌 진짜 5만 원권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아라는 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앉았다. 지금까지도 그 돈의 주인은 찾으러 오지 않는다. 이렇게 큰돈을 분실했다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을 거고 범죄에 사용된 돈이거나 돈의 주인이 큰일을 당했거나 한 것 같다.
이런 결론에 이르자 아라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분명 범죄에 도용된 것 같다.
'이 돈을 경찰에 신고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하고, 공범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겠지? 경찰이 CCTV를 보고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며 지하철 밖으로 그걸 들고 나왔는지 물으면 뭐라고 하지? 내가 사실을 말해도 믿어줄까? 중간 수거하는 이? 전달자? 뭐 그런 걸로 오해받지는 않을까? 내가 돈을 경찰에 신고했다고, 범죄인에게 쫓기게 되거나 해코지를 당하면 어쩌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이어갔다.
그대로 두고 나갈지, 그 돈을 어디에 주는 두 가지로 선택지가 좁혀졌다. 아라는 굳게 결심한다. 아라 핸드백 속에 예비로 들고 다니던 천 시장 백을 꺼내 돈 들어있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넣었다. 그 위에 아라가 쓰고 있던 니트 목도리 후드 넥워머를 얹고 장갑도 넣었다. 아까 노상에서 팔던 10개 5천 원짜리 묶음 양말도 넣었다.
아라는 검정 후드티의 모자를 깊게 눌러쓴다. 모자 부분을 앞으로 더 빼내서 얼굴을 덮는다. 가방 안 검은색 마스크를 꺼내 썼다.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거의 다 가려졌다. 아라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아까 라면 먹으려는 데 돈이 모자란다며 몇백 원을 요구했던 노숙인이 있었던 곳으로 갔다. 그는 보이지 않는다. 현금 2천 원을 꺼내 지하철 자동발매기로 갔다. 현금을 기계에 넣고 가는 장소를 누른 후 티켓을 받았다. 그때였다. 아까 아라에게 몇백 원을 달라고 했던 노숙인이 아라에게 다가왔다.
"저기요, 너무 춥고 배고파서 컵라면 하나 사 먹으려 하니 돈이 몇백 원 모자라네요. 남은 잔돈 좀 주세요."
아까 아라에게 똑같은 말로 동전 몇백 원 달라고 했다는 사실을 기억 못 한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같은 말을 하며 동전 달라고 했을까? 아라는 남은 잔돈을 그에게 건넨다.
"꼭 라면 사드셔야 해요."
"네에"
"잠시만요."
지갑 안에서 천 원짜리 몇 개를 꺼내 노숙인에게 주며 말한다.
"소주 사드시면 안 돼요."
"아, 당연히 라면 먹어야죠. 고마워요."
"저 부탁 하나만 할게요. 오늘 쉼터 가시나요?"
노숙인은 돈만 줄 것이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뭐 어려운 부탁 하려나? 지난번 어떤 총각처럼 맛있는 밥 사주고 돈 20만 원 주면서 통장 만들게 하려나? 아니면 50대 남자처럼 내 주민증으로 휴대전화 10대 개설하려나? 그때 그 남자는 짜도 너무 짰어. 겨우 5만 원 줬지. 나를 뭐로 보고. 이번에는 50만 원 불러야겠어. 저 여자가 뭘 하든 나야 상관없지. 돈만 받으면 그만이니.'
"오늘 추우니 거기서 자야죠. 왜요? 나한테 할 말 있어요?'
"네. 이 시장 천 바구니 쉼터 담당자나 봉사하는 선생님께 주세요. 지나가던 누가 기증한다고 줬다 해주세요."
"직접 주고 가지 그래요? 지하철 바로 위에 있어요. 가까워."
"저 지금 빨리 어디 가야 해서 그래요. 그리고 좋은 것도 아니고 쓰던 거 주로 넣은 거라 부끄럽기도 하고요."
"알았어요. 내가 갖다 줄게요."
"감사합니다."
"근데 왜 이렇게 무거운겨? 돈덩이 들었능교?"
"아이고 돈이 거기 왜 있겠어요? 책 여러 권 넣었어요."
"우리 같은 사람이 누가 책 본다고. 어허. 참."
"혹시 모르죠. 볼 분이 있을걸요? 봉사자가 읽어도 읽을 거니 그냥 넣었어요."
"알았어요. 쓸모없겠지만 마음이 착하니 부탁 들어주지요."
"네. 감사합니다. 춥고 저녁 시간 다 되었는데 얼른 가세요"
"알았어요."
인사를 한 후 그가 올라가는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아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지하철 타기 위해 개표구로 향했다.

대구로 돌아온 아라는 처음에는 뉴스를 샅샅이 뒤졌다. 인터넷 뉴스, MBC, KBS, MBN, YTN, 연합뉴스 등등 뉴스란 뉴스를 다 뒤졌다. 사건 사고란에 돈을 분실한 사람이라던가, 마약이나 범죄 사건, 이름 모를 사람의 억대 기부 등이 나오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을 살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아라는 지하철 검정비닐에 돈 억대 돈 사건이 잊혔다. 그런 일이 꿈속에서 스쳐 지나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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