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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비 Nov 06. 2023

내가 만난 튀르키예(@못골)

#5. 튀르키예에 대하여

터키에 대한 우리들의 호감도는 좋은 편이다. 한국 동란 때 참전해준 때문이기도 하지만 터키의 옛 명칭은 돌궐이다. 돌궐은 우리 동이족과 언어 체계나 단어 부문에서 유사성이 많다. 1주일간의 터키여행에서 직접 마주친 사람은 10명 정도이다. 그들을 통해서 전체를 짐작하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겠지만 어쨌든 나의 생각을 서술해 본다.


첫째 날, 승합차를 타고 숙소로 갔다. 심하게 비탈진 상가 2층에 마련된 숙소의 입구는 매우 번잡한 곳인데도 기사는 속도를 크게 줄이지 않고 운전을 한다. 차에 내릴 때 오토바이와 살짝 스쳤다. 오토바이 주인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 가버린다. 그냥 불편해도 서로 양보하며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좁고, 메마르고 성급한 우리들의 품성과는 아주 다르다. 


카메라를 고치기 위해 서비스센터를 찾아갈 때, 길을 물으니 사람들은 자신이 알려 줄 수 있는 능력 내에서 최대한 도와주려 애를 썼다. 외국인은 현지 사정을 잘 모르니 수리 요금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 대수롭지 않게 그냥 무료라고 한다. 같은 경우 수리비가 우리나라에서는 1만 7천원이다. 바다 끝에 자리 잡은 요새에 도착하여 입장권을 구매하려고 하니 매표소 여직원이 말린다. 공사 중이라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직원이 아니라 관광객의 관점에서 배려해주는 그녀의 자세가 고맙다.


해변에는 비키니로 일광욕을 하는 사람, 땀 흘리며 조깅을 하는 사람, 바다에 풍덩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 자기 생활에 열심이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중시하는 우리와는 다르다. 



공항에서 카파도키아로 옮겨 가기 위해 줄을 서 있자 원주민 여성이 아이와 함께 있으면 줄 서는 곳이 다르다고 말한다. 아이가 있으면 우선권을 부여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아이들을 귀하게 대한다. 아이들과 개들을 데리고는 입장이 불가하다는 개 같은 우리들의 커피 업소와는 한참 다르다. 


카파도키아에서 여정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사십 정도 되어 보이는 남루한 옷차림의 여인이 ‘헬로’ 하며 낯선 외국인인 나를 불렀다. 환영인지 애원인지 구분되지 않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나는 애원 쪽으로 생각을 했다. 여기저기 동굴 호텔이 있고 관광지 특유의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어수선한 환경이 이제 개발을 시작하는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개발에 밀려 자금력이 없는 원주민은 뒤로 밀려나고 투자가 목적인 외지인들이 주요 지점을 장악하고 있었다. 멀리 산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시가지도 주택이라기보다 관공서, 펜션 같은 저택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주민의 동네는 아닐 것이다. 먼지 자욱이 앉은 벤치 위에 공간을 메우고 있는 노인들은 날씨 때문일까 모두 지친 모습들이다. 식사 서빙을 하는 터키의 젊고 예쁜 소녀도 여유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산다는 것이 고달프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배에서 젊은 연인을 봤다. 사랑한다는 감정이 온몸에서 느껴지는 표정들이다. 남자의 품에 기대어 사랑하는 사람을 올려보는 시선과 자세가 휘리릭 눈에 들어온다. 카메라를 들이대게 하지만 그들 모르게 촬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스러운 장면이 휘발된다. 늙은 아시안 할배가 자신들을 촬영하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나를 향해 웃는다. 나도 즐거운 표정으로 모델이 되어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꾸벅 보낸다. 상대방이 악의가 없다면 나도 얼마든지 호응해 줄 수 있다는 당신들의 열린 마음이 좋다. 


시장에서 아이스크림 가게 점원이 손흥민의 팬이라며 한국 사람에 대한 친근감을 보인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낯익은 친구일까? 외국의 이방인일까? 한국 사람임을 알고 여러 가지 말을 이어보려는 친근함이나 도와주려는 마음 씀씀이가 피부로 느껴진다. ‘이모'와 '아줌마’를 연발하며 호객하는 그들의 행위도 악의보다는 친근감으로 와 닿는다. 


어른은 허리를 펴기도 힘든 좁은 지하도시 속 관광에 조심, 또 조심했지만 천장에 나도 머리를 몇 번이나 부딪혔다. 안전사고의 위험이 매우 큰데도 안전장비 하나 없이 입장객을 들이는 튀르키예의 무감각에 놀랍다. 작고 보이지 않는 곳도 대비해야 한다. 안전을 중시하는 우리와는 매우 다르다.


손녀와 내가 그렇게 환상처럼 그렸던 아흐랄라 계곡은 장산 계곡만도 못한 관광지였다. 손녀도 크게 실망하는 눈치이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정도이지 우리처럼 아이들이 미친 듯 물에 뛰어 들어가는 경우도 없다. 물 위에 말뚝을 박아 임시 건물을 올리고 평상을 설치했다. 그 위에 앉아 음료수와 맥주를 주문했다. 주변에 둘러보아도 술을 마시는 사람이 없다. 여기는 이슬람 문화라 술을 즐기지 않는다. 집에서야 어떨지 모르지만 어쨌든 밖에서 술 마시는 사람은 볼 수가 없다. 건전해 보이기는 하지만 왠지 갑갑한 생각이 들었다. 삶의 주변이 갑갑하고 화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오를 때, 삶이 덧없이 느껴질 때, 그들은 무엇으로 대신할까? 일상에서 소음처럼 들리는 알라를 부르는 소리가 그들의 유일한 안식일까?

이상의 경험이 내가 만난 터키인들이다.


짐작이나 들은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직접 만난 터키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하다. 이방인이 일상으로 널브러져 있으니 관광객은 이미 생활의 일부이다. 때문에 거리감보다는 친밀감과 배려심으로 가득하다. 
빠르고 크고, 많으면 대충이 된다. 그들이 그런 것 같다. 도심은 우리만큼 빨리 빨리이고 시골은 넓고 커서 세밀함이 없다. 물산이 풍부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동서가 만나는 요충지이기 때문일까? 고달픈 삶 속에서도 그들의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깃들어 있다. 긍정적인 사고에 낙관적인 삶의 태도가 더해져 겉으로 보여 지는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삶을 즐기고 수용하며 생활하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가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독특한 사회이다.







[#5. 튀르키예에 대하여]  

 - 아버지 못골 글 보러가기 : 내가 만난 튀르키예 https://brunch.co.kr/@ddbee/33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환대 https://brunch.co.kr/@ddbee/30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모든 욕구 위의 종교 https://brunch.co.kr/@ddbee/32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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