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땡비 Apr 19. 2024

오븐 스프링(Oven Spring)(by. 아난)

#14. 나의 해우소


걸쭉한 미색의 카스테라 반죽을 동그란 원형 빵틀에 붓는다. 예열이 다 된 오븐 문을 열면 더운 공기가 얼굴을 때린다. 서둘러 빵틀을 오븐 가운데에 넣고 얼른 오븐 문을 닫는다. 165도에 35분으로 설정해 두고서 오븐 앞에 두었던 카메라로 동영상 촬영을 서둘러 시작한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빵반죽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븐에 반죽을 넣으면 뜨거운 열기로 가스가 방출되면서 빵의 부피감이 커진다. 이를 오븐 스프링(Oven Spring)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용수철처럼 빵이 구워지면서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항상 먹음직스러운 빵이 나오기는 어렵다. 온도를 잘못 맞추면 이상한 풍미의 빵이 되거나 조금만 더 저으면 딱딱한 케이크가 되어 나온다. 정확한 재료 계량부터 온도, 시간까지 딱 맞게 들어가야 오븐에서 맛있는 빵이 구워진다. 빵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마침내 반죽을 오븐에 넣고 돌아서면 초토화된 주방이 펼쳐져 있다. 오랜 시간 서서 작업하기 때문에 발바닥도 시원찮은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베이킹 세계에서의 이런 고난은 과정에 더 집중하게 하고 결과를 더 희열 넘치게 만든다.


부정적인 에너지에 압도될 때면 나는 먹고 싶은 빵을 생각한다. 이리저리 유튜브를 탐험하며 마음에 드는 레시피를 찾고, 주중에 재료들을 장바구니에 담아 주문해 둔다. 드디어 주말이다! 내가 먹을 빵이기 때문에, 내 맘대로 여러 재료와 레시피를 조합하여 실험하듯 빵을 만든다. 잠옷 차림으로 귀가 터질 듯이 좋아하는 락을 틀어놓고서 계량을 한다. 순간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재료들을 휘젓는 것에 집중한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빵반죽과 나만이 존재하는 느낌이다.


오븐을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빵을 만들 때마다 나는 근심의 무한고리를 끊을 수 있었다. 근심이 근심을 낳으며 뻗어나갈수록 내 에너지가 소모되기 마련인데 오븐 앞에 서면 그 과정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대학교 자취생 때 연이은 이사에도 나는 미니오븐을 품에 안고 있었다. 밀가루, 물, 달걀, 우유라는 각자 존재하던 재료들이 한데 모여 오븐에 들어가면 무언가가 되어 나오는 게 늘 신기했다. 전혀 결과물을 예측할 수 없는 모양의 가루와 액체들이 근사한 케이크나 포카치아 같은 빵이 되어 나올 때면 묘한 성취감도 느끼며 뿌듯해진다. 잘 구워진 빵을 사람들과 나누었을 때 그들이 보내주는 고마움, 칭찬, 웃음들이 내게 또 에너지가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빵 굽기 전에는 걱정으로 너덜너덜했던 내가 빵을 다 굽고 나면 에너지가 차올라있다.


오븐 안에서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오븐 스프링을 보면 그 빵이 꼭 나 같기도 하다. 그간의 노력들이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자신을 펼치려 애쓰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빵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빵이 커나가는 느낌 같아 뭉클해지고 대견하다. 그래서 베이킹을 하다 보면 반죽이 내 고민이나 근심을 다 가져가 준다. 뜨거운 오븐 안에서 열기에 근심은 날아가버리고 오히려 내가 힘을 얻는다. 그래서 빵을 구울 때마다 오븐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까치발을 하고서 총총 거리며 오븐 스프링을 늘 찍어둔다. 핸드폰 사진첩에서 그 영상들을 여러 번 돌려보면 환상적이다.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가는 오븐 안에서 그 에너지가 온전히 와닿는다.


빵을 구울 여유가 없는 평일에 근심이 스멀스멀 마음으로 찾아오면, 나는 집베란다 한 켠에 자리 잡은 오븐을 그냥 쳐다본다.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진다. 오븐에 무언가를 넣기 위해 고민하는 순간부터 만들고 나누는 모든 과정에서 나는 치유된다. 내가 엉망이든 멋진 모습이든 상관없이 언제든 내가 애쓰지 않아도 해우소를 찾아갈 수 있도록 가장 편한 곳에 한 칸 만들어두었다. 벽에는 좋아하는 캐릭터가 빵을 굽는 포스터를 붙여두고서 반죽기와 오븐이 떡 하니 자리 잡은 것을 보면 행복하다. 존재만으로도 나에게 온기를 주면서 힘을 더해주는 오븐이 있어 오늘도 마음 한 켠 고민을 싹 날려 보낸다!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땡비] #14. 나의 해우소

 - 못골 글 보러가기 : 기장대로 https://brunch.co.kr/@ddbee/65

 - 흔희의 글 보러가기 : 장독대에 묵혀둔 슬픔 하나. 그리고 둘. https://brunch.co.kr/@ddbee/64

 - 아난의 글 보러가기 : 오븐 스프링 https://brunch.co.kr/@ddbee/63



못골, 흔희, 아난의 글을 한 달에 2번 뉴스레터 땡비로 받아보는 거 어때요?

 - 땡비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35860

 - 지난 글 보러가기 : https://ddbee.stibee.com/

매거진의 이전글 첫 기억(@못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