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깨닫게 되는 것들 (인간관계 외 편)

#자기 정체성의 상실 #노후 준비 #취미 활동 #현금흐름 #역할 분담

by 미스틱
아침부터 밤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간. 퇴직자들에게 남은 것은 현실과의 단절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타의로 내려온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여유가 아닌 방황. 회의감도 들고, 상실감도 들고, 위축되는 느낌. 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 어느 유투버의 동영상 중에서 -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 중의 하나는 '여건만 되면 1년 정도만 푹 쉬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 년 내내 노는 날이 지속된다면 놀이도 일과 마찬가지로 따분한 것이 된다'고 말한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막상 퇴직을 하고 나니 현역 시절 그토록 갈구했던 휴식의 달콤함은 한 달도 채 지나기도 전에 초조와 불안의 감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산이 깊으면 골도 깊다'라고 했는가. 직장에서 소위 잘 나가던 사람일수록 퇴직의 충격과 고통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오랜 기간 분투하면서 쟁취했던 성공의 상징인 직위와 역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충분히 괜찮은 삶을 살았더라도 퇴직은 동전의 양면처럼 경쟁에서의 도태와 패배를 의미한다.

인간은 하루를 살면서 오만가지 정도의 생각을 한다. 그중 80%는 쓸데없는 고민과 걱정이 차지한다고 한다. 남들이 출근한 후 단지 내 피트니스 센터만 가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당장은 부족하나마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마저도 9개월 후에 끝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막상 퇴직을 하고 나니 별의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라도 뭔가를 준비하긴 해야 하는데...' 쓸데없는 생각만 늘어나고, '맴찢' 속앓이만 하게 된다. 요즘 코로나로 인한 취업 절벽에 20대조차 잃어버린 세대라고 하지 않은가? 하지만 뭔가를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내 삶의 통제권과 칼자루를 더 이상 남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월급쟁이는 더 이상 하고 싶진 않다!!!


나름 S그룹 입사해서 유통기업의 임원까지 했고, 회사를 다닐 때 경영학 박사까지 취득해 문무를 겸비한 인재(?)인데도 내 앞길은 한길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짙은 안개만이 가득히 드리워진 것 같았다. 아직도 난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그래도 1월부터는 내가 여태껏 하고 싶었고, 배우고 싶었던 '부동산 경매 과정'을 아내와 함께 신청해 배우기도 했다. 오늘이 첫날이니 오랜만에 출근하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분주해진다. 퇴직 후 처음으로 사회 모임에 나가기 때문이다. 3개월 과정이니 제대로 배워서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할 예정이다. 잘되면 내용도 공유하겠다.



이전에 작성했던 '퇴직 후 깨닫게 된 것들(인간관계편)'은 부족한 글솜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께서 조회와 공감을 해주셨다. 글을 작성한 이후 처음으로 조회수가 단기간에 훌쩍 5만 회를 넘긴 것이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왔다. 코로나로 인한 기업의 인력 구조조정 한파 영향 때문에 퇴직을 생각하거나 퇴직을 꿈꾸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아마 내 글이 이전과 달리 공감을 더 주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퇴직 후 인간관계 이외에 느끼게 된 것들을 추가적으로 작성해 보았다. 퇴직을 준비하거나 하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심적인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용이 너무 길어 끝가지 못 보실 분들이 많을 것 같지만 문맥상 한편으로 작성하기로 결심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봐주셨으면 한다. (_ _)y



첫째, '자기 정체성(Self Identity)의 혼란'을 잘 극복해야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직업은 자신의 이름보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정체성을 부여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회사명과 직함은 그 사람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 사람을 평가할 때 명함이 주는 편견과 선입견은 다른 어떤 조건값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를 만날 때 우린 당연한 듯이 명함을 주고받는다. 명함이 없다는 것은 '존재감과 자기 정체성의 상실'로 연결된다. 그동안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과 완전하게 단절된 느낌이 들면서 심리적인 위축감과 절망감이 커지고, 급기야는 사람 만나는 것을 기피까지 하게 된다. 명함과 소득의 상실이 길어질수록 자신감과 자존감을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고, 한번 떨어진 자신감과 자존감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퇴직 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정체성'의 확립하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탐색하고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직업 정체성을 제일 먼저 버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부장, 임원으로 퇴직을 했다면 부장, 임원이었다는 타이틀을 제일 먼저 버려야 한다. 이제부터는 로컬 사회의 구성원이 된 것이다. 명함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 이제부터라도 회사 명함 대신 '자신을 유쾌하고 소개할 수 있는 간단한 소개 멘트'를 준비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이전에 저는 OO기업의 OO직책으로 근무하다 최근 퇴사를 했습니다. 저는 현재 퇴직 후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진정한 나 자신'인 '코나투스(Conatus)'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하고 싶었던 OO공부와 OO도 준비하고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자 행복 추구자 OOO입니다"라고 말이다.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코나투스(conatus) : 라틴어 코나투스는 '노력하다'라는 코너(conor)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철학적 개념으로 스피노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유한한 사물들 즉, 모든 유한한 양태들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둘째, 퇴직 후 삶의 루틴을 만들어야 한다. 퇴직 초반에는 '그동안 고생했으니 잠시 푹 쉬어도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한없이 누린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초조함과 불안감이 맘속에 자리잡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당장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압박감마저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활의 리듬 즉, 삶의 규칙과 루틴을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단기, 중기, 장기 목표를 수립해서 실천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나는 단기적으로 세 가지 목표를 수립했다.


1. 아침 일찍 일어나서 꾸준하게 운동하기 & 샤워하기

2. 부동산 경매 및 NPL(부실채권) 책 10권 읽기 & 주 1회 경매학원 다니기 (3개월 과정)

3. 일주일에 글 두 편 작성하기


그래서 난 퇴직하자마자 휴식과 사색, 그리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빈 방을 새롭게 꾸며 서재를 만들었다. 책상도 갖다 놓고, 노트북과 프린터, 스탠드 조명, 그리고 이전 직장에서 쓰던 텀블러와 필기 도구들도 갖다 놓으니 마치 이전에 출근하던 직장 사무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므흣^^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과 샤워를 한 후 아내가 차려준 간단한 아침식사를 먹은 후 바로 사무실(?)로 출근을 한다. 이동거리는 3초!!! 당황스럽다.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경매와 NPL 관련 부동산 책들을 읽는다. 퇴근은 17시로 정했다. 하지만 가끔 브런치에 올릴 글을 퇴고하느라 야근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아내의 등짝 스매시는 덤이다. 백수가 몸살 나고 과로사한다는 게 남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


훗날 돌아보면 아마 이 시기가 인생 2막/후반전을 준비할 나만의 무기를 만든 시기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그것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습득이 될 수도 있으며, 새롭게 도전하는 자격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욕이 없어서 시작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시작을 안 해서 의욕이 없다. 의욕에는 관성의 법칙이 존재한다. - 에밀 크레펠린 -


셋째, 소득이 단절된 만큼 소비 수준도 줄여야 한다. 퇴직을 하더라도 퇴직 전의 씀씀이가 있다 보니 당장 생활비와 각종 지출을 줄이기는 쉽지 않다. 아내 입장에서 당장 생활비를 줄이면 충격이 커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상의해서 줄여야 한다. 수입은 단절되고 지출만 되기 때문에 항상 퇴직금 현황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퇴직 후 '첫해'의 지출을 반드시 통제해야 한다. 대부분의 퇴직자들은 그간 고생을 빌미로 여행이다, 외식이다, 쇼핑이다를 마구 남발하게 되는 시기가 바로 이 때다.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심리가 만연하다 보니 생각지도 않은 소비와 지출로 훗날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이때 해외여행을 하지 않으면 평생 못한다'는 얘기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퇴직 첫해는 합리적인 선에서 지출을 하도록 세심하게 신경 쓰라는 말이다.


넷째, 현역 시절 때 퇴직 후 생계 및 노후 대책 준비가 너무 미흡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정년까지 다닐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경우가 많다. 이상하게 대기업 평균 퇴직 시기가 49.3세인 점을 감안하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뭘 믿고 그리 당당한지 모르겠다. 퇴직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최근 대기업 임원 연령이 40대로 앞당겨지고 있는 시점을 감안한다면 퇴직 시기는 더 앞당겨질 확률이 높다.


노후 대책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퇴직 후 간절하게 꿈꿔왔던 '시간의 자유'는 '시간의 지옥'으로 바뀌게 될 수밖에 없다. "퇴직하면 어떻게든 먹고살 수는 있겠지", "돌아보면 굶어 죽는 사람도 없는데 무슨 뾰족한 수가 다 있겠지", "안되면 막노동이라도 해서 먹고살면 되잖아" 등 현역 시절 때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뿡뿡 뿜어 나온다. 근자감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인생은 연습이 아니라 실전'임을 명심해야 한다.


"먹고살기도 바쁘고, 대출 이자 갚기도 빠듯한데 투자는커녕 버티기도 힘들다"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일정한 수입이 있을 때 노후 대책을 준비하지 않으면 정말 답이 없다. 수입이 끊기면 개인의 신용도 또한 하락하고 심지어 대출도 까다로워진다.

노후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연금 포트폴리오를 잘 짜야한다는 것이다. 회사의 퇴직 적립금의 경우 일반적으로는 회사가 책임지고 운영하는 DB형으로 세팅되어 있다. 즉 퇴직 직전 '3개월 평균임금 X근속연수'만큼 꾸준하게 적립해서 퇴직할 때 일시불로 받는 형태다.


이와는 달리 퇴직연금 DC형은 회사가 아닌 근로자 본인이 직접 자금을 운영할 수 있는 상품인 반면 투자에 대한 결과도 본인의 책임이다. 여건이 된다면 가급적 DB형을 DC형으로 전환할 것을 적극 추천한다. 최근 해외 ETF 수익률이 연중 최고의 수익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성장성이 좋은 종목을 선정해 장기간 투자한다면 노후에 기대 이상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재직 중에 개인이 자율적으로 가입할 수 있는 개인형 퇴직연금인 IRP가 있다. 퇴직을 한 이후에도 계속 적립을 할 수 있으며 연간 1,800만까지 적립도 가능할뿐더러 최대 700만 원까지 세액 공제 혜택도 있으니

가급적 IRP 계좌를 만들기를 추천한다. 퇴직연금 DC형과 IRP 정도만 있어도 퇴직 후 현금 흐름이 발생하기 때문에 노후 준비에 큰 도움이 된다. 퇴직하고 65세가 되면 국민연금이 또 나오니 퇴직 후 노후 대책은 퇴직 이후부터 65세까지 잘 버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금 이외 노후 준비로는 월세가 나오는 수익형 상가나 (사무용) 오피스텔 등에 투자해 현금 흐름(월급 외 소득)을 만들어 놓으면 좋다. '레버리지'를 활용하면 적은 돈으로도 투자가 가능하다. 들어오는 월세가 나가는 대출 이자보다 높으면 훌륭한 투자다.


연금과 상가 월세 정도면 퇴직 후 현금 흐름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력이 더 있으면 배당주식 투자를 통해 연금처럼 배당도 받고, 장기간 보유를 통한 시세 차익도 올리는 방법도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내가 아는 오십 대 독신 회사원은 2억을 투자해서 벌써 월 150만 원 이상의 현금 흐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만약 가지고 있는 돈이 적다면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해 더 작은 규모의 아파트나 빌라로 옮긴 후 남은 돈으로 투자를 해서 현금흐름을 만드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생활 규모가 줄어드니 지출도 줄어들게 되고, 남는 돈으로 투자도 할 수 있으니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이 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알아야 할 개념 중의 하나가 '레버리지'란 용어다. 타인의 자본을 활용해서 투자를 하기 때문에 레버리지는 모든 수익 창출의 기본적 개념이다. 빚과 레버리지는 다른 개념이다. 부자는 빚을 절대 갚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빚을 레버리지 하기 때문이다. 만약 레버리지를 통해 들어오는 수입이 대출이자보다 많다면 그것은 훌륭한 투자 자산이 되는 것이다. 내 주변의 돈 많은 사업가들은 절대 자기 자본으로 투자를 하는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만큼 레버리지는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투자 수단이다.




다섯째, 현역 시절 때 여행,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역 시절엔 시간 때문에 하지 못했고, 퇴직 후에는 비용과 건강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여기에서 가장 큰 변수는 건강이다. 건강한 시기에 미루게 되면 영영 못하게 될 수 있는 게 바로 여행이다. 현역 시절에 바쁘고 여유가 없더라도 여행만은 꼭 많이 하길 추천한다.


퇴직 후 가장 큰 문제는 혼자 놀 줄 모르는 것이다. 누군가가 함께 있어야 하고, 함께 놀아야 한다고 착각한다. 혼자 놀 때 진정한 자유를 만날 수 있는데 말이다. 외로운 건 순간적인 감정이다. 내면의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홀로서기를 해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취미 활동이 필수적이다. 오랫동안 바라고 기대 오던 습관을 벗어나 혼자의 취미, 산책, 식사, 사색, 독서, 운동, 차 한잔 등을 즐기며 여유롭게 느긋한 시간을 보내면 진정한 내면의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특히 TV를 멀리 해야 한다. 하루에 세 시간만 TV를 시청하더라도 일 년이면 1,000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TV를 줄이고, 자신만의 생산적인 취미를 만들어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확장해야 한다. 그간 힘든 직장생활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나 우울한 감정을 달래주던 술은 가급적 줄여야 한다. 술중독에 빠지면 체력과 자신감도 떨어져 재기도 어렵게 된다.


나는 취미활동으로 '낚시'와 '회 뜨기'를 배울 생각이다. 현역 시절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던 '자연인' 이 꼭 되고 싶었다. 그들의 가장 매력적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삶의 욕망에서 벗어나 '적은 돈은 최대한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특히 텃밭 농사와 양계, 양봉 등을 통해 삼시 세끼 자급자족을 하는 모습은 내겐 가장 이상적으로 비쳐졌다. 거기다 '낚시'와 '회 뜨기' 기술만 더해지면 자급자족의 가장 큰 그림이 완성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끔은 취미활동이 노후의 경제적 활동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으니 깊이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여섯째, 역할의 변화를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 주부들은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집안에 죽치고 들어앉은 늙은 남편을 ‘오치 누레바(濡れた落ち葉)’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젖은 낙엽’이라는 뜻이다. 젖은 낙엽은 한번 눌러 붙으면 빗자루로 쓸어도 당 바닥에서 떨어질 줄 모르기 때문에 나온 말로써 평생 동안 가족을 위해 일하다 은퇴한 남편 입장에서는 상당히 모욕적인 말이다.


퇴직 후 삶의 터전이 회사에서 집으로 바뀌기 때문에 일 중심의 남편이 관계 중심인 아내의 집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아내는 남편이 일만 하면서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기간에 지역 커뮤니티와 네트워크를 통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나름 바쁘게 보내기도 하지만 퇴직한 남편의 경우 홀로서기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내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우스갯소리로 퇴직한 남편에게 가장 필요한 것 다섯 가지는 아내, 와이프, 처, 마누라, 집사람이지만 아내에게는 우선순위에 남편이 빠져 있다. 일본의 노후 전문가 오가와 유리씨는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편은 노후 준비 잘해둔 남편, 요리 잘하는 남편, 아내 말 잘 듣는 남편이 아닌 집에 없는 남편"이라고 말했다.


나 또한 현역 시절에 오랫동안 주말부부로 지내다 보니 아내와의 관계가 매우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퇴직 후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삼식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혼자 있을 때 아점과 점심 두 끼로 때웠는데 내가 아침 일찍 운동을 하고 오니 아점을 분리해서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젖은 낙엽'이 되지 않기 위해서 간단한 요리, 청소, 설거지 등을 함께 분담할 예정이다. 어차피 홀로서기를 해야 할 노후라면 나도 필요한 스킬이다.




퇴직 후 절대 기죽으면 안 된다. 자신감과 자존감마저 무너지면 회복할 방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도 할 수 있다', '나 아직 안 죽었다'는 호기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감과 꿈마저 잃으면 긴 인생 여정에 막다른 길로 내몰릴 수 있다. 원래 인생의 가장 황금기는 바로 '황혼 녁의 노을'이다.


'지금처럼 살거나, 지금부터 살거나.' 돌이켜보면 짧은 인생을 살면서 너무 쓸데없는 물건과 관계에 불필요한 에너지와 시간, 비용을 쓰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큰 집과 자동차, 가구와 옷, 그리고 불필요하고 형식적인 인간관계 등. 지금부터라도 이러한 것들에 대한 선택과 집중, 우선순위 정립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죽음 앞에서는 외부의 기대, 자부심, 좌절과 실패 등은 덧없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는다'라고 말한 스티브 잡스의 명언처럼 이제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삶의 가치를 높이는지, 그리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여태껏 채우려고만 달려왔다면 이제부터는 비우면서 살아가는 지혜도 필요한 것 같다. 물론 현역 시절엔 후회 없는 퇴직 후 인생을 만들도록 노력하면서 말이다.



keyword
이전 01화퇴직 후 깨닫게 되는 것들(인간관계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