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울 정도로 인색한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자린고비'입니다. 자린고비는 '기름에 절인 지방(紙榜)'을 가리키는 말로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쓰고 불태워 버려야 할 지방이 아까워 버리지 못하고 다시 쓰는 인색한 사람을 말합니다. 원래는 '결은 고비(考妣)'란 말에서 유래를 했는데 여기서 '결은'은 '겯다'로 물건을 기름에 담그거나 발라서 듬뿍 묻게 하는 뜻이며, 고비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의미합니다. 요약하면 '절은 고비'가 시간이 지나며 '자린고비'란 말로 변했다는 것이죠.
** 다랍다 : 인색하다 또는 지저분하다는 뜻
출처 : SK BroadBand - BANDGIGA : 자린고비 편 스틸 컷
과거 저는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태어나 보니 재벌집 막내아들 도준이가 아닌 흙수저 집안의 막내인 까망눈동자였던 것이죠. 부엌도 없는 변변치 못한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태어난 후 가세가 기울어 그 단칸방까지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 때문이란 생각에 한동안 태어난 것 자체를 후회하고 괴로워했었죠.
식구가 많아 형 누나들 틈새에 끼어 밥도 제대로 못 먹다 보니 태어난 것을 후회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먹을 게 앞에 있으면 양손을 사용해 밥과 음식을 씹지 않고 목구멍으로 삼키는 신공을 일찍부터 터득하게 되었죠. 그 당시 배부른 게 가장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배부르면 그냥 벌렁 누우면 그것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었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위장병이란 놈과 함께 잘 살아오고 있습니다. ^^
초등학교 입학 후부터는 집안 사정도 많이 호전되어 자가 집에서 밥은 그럭저럭 먹고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년 시절 가난에 대한 결핍이 마음속에 강하게 자리매김했던 탓인지 저는 훗날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으면 좋은 집에서 따뜻하게 배부르게 먹여야겠단 생각을 일찍부터 했었습니다. 20대까지는 큰 문제 없이 인생이 풀리는 듯했죠. 지방대지만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국립대에 입학했고, ROTC 장교 후보생 생활을 하면서 졸업 후 입대 전 S그룹 입사도 운 좋게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대 후 호기롭게 입사를 한 후 급여를 보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적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매일 퇴근 후면 약속이나 한 듯이 잡히는 술자리 때문에 통장의 잔고는 채워지기는커녕 비워져 마이너스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되었고 짝꿍은 임신과 동시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출산과 육아에만 집중을 하게 되었죠. 아이가 두 명으로 늘어나자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두려움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허리 끈을 졸라매고 자발적 자린고비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음식이나 술값을 아끼기 위해 계산 전에 화장실을 가거나 신발 끈을 묶는 옹졸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쓸 때 쓰더라도 명품이라고 불리는 사치품은 일절 구매하지 않았죠. 그 후로 자녀 둘을 키우는 외벌이 직장인의 삶은 결코 녹녹치 않았습니다. 빚으로 구매한 소형평수의 아파트는 트래픽 파이터(traffic fighter)의 삶을 계속 살도록 종용했죠.
**트래픽 파이터 : 자신의 직장과 삶의 방식은 싫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그 후에 삶은 일반 직장인들의 고루하고 비루한 삶의 여정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소형 평수를 국민 평수로 옮기면서 또 빚을 갚는 삶이 이어졌고, 그 후로 다시 한번 큰 평수의 아파트를 매입하게 되면서 빚을 갚는 고단한 인생은 20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25년 이상이 지나면서 퇴직을 염두에 두고 현금흐름을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손댄 부동산 투자의 상흔이 또 빚으로 이어졌고 퇴직한 지금까지 삶의 무게로 남아있습니다. 레버리지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빚이라고 말하는 놈과 한 평생 동고동락을 한 것이죠. 짧은 시간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고단한 삶을 살아야만 할까?"
출처 : Pixabay
어디선가 폐지를 줍는 노인들도 죽을 때 베갯속에 돈을 남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번 돈을 다 못 쓰고 죽는 것이죠. 그런데 왜 이렇게 우리는 다 쓰지도 못할 돈을 주야장천 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을까요? 그건 아마 두려움 때문일 겁니다. 늙음에 대한 두려움, 비판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이죠. 이런 두려움은 흔히 '사회적 유전의 법칙'을 통해 물려받게 됩니다.
'사회적 유전의 법칙'은 세대로부터 쭈욱 물려받은 미신과 믿음, 사상과 같은 것들이 다음 세대의 마음에 심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나 삶의 환경에 의해 형성된 각종 두려움들이 신체 세포나 기관처럼 자녀의 성격을 형성하고 되고, 이렇게 형성된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성인이 되면 그들 부모들을 통해 형성된 각종 믿음과 신념, 결핍과 두려움의 감정을 토대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가난에 대한 결핍의 감정은 돈에 대한 집착과 애착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시대가 바뀌어 물질적 풍요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가난과 굶주림은 사라졌는데도 우리의 몸은 여전히 비상시를 대비해 지방을 과도하게 축척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가난과 결핍의 유전자가 여전히 몸속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죠.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해 넘쳐나고 있는데 우리는 항상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 살고 있지만 현대인들은 이전보다 더 큰 정신적 공허함과 심리적 결핍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죠.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기대수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돈 없이 오래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 없이 오래 산다면 건강해도 문제고 건강이 안좋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설국열차처럼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면 어느새 퇴직이라는 복병을 만나게 됩니다. 막상 퇴직을 하면 재취업이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죠. 그때부터 두 가지 두려움이 생깁니다. 얼마 모으지 못한 돈마저도 얼마 안 가 전부 없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돈 없이 오래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죠. 시간이 갈수록 두려움의 눈덩이 효과는 더욱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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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저 또한 실체 없는, 막연한 두려움의 눈덩이에 짓눌려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의 눈덩이를 깨뜨리기 위해 저는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두 가지 질문을 도출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는 얼마를 모으면 이 고단한 삶의 쳇바퀴를 멈출 수 있는지였고, 다른 한 가지는 얼마 남지 않는 짐 보따리로 어떻게 노후 생활을 해나갈 것인가였죠.
이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저는 남은 생애 주기(life cycle)를 바탕으로 노후 설계를 개략적으로 해보았습니다. 기대수명이 100세를 넘어간다고 하지만 그 기준을 적용하기는 다소 모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 한국인의 평균수명인 83세를 기준으로 정했죠. 현재 제가 50대 중반이니 남은 수명은 28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할뻔 했습니다. 그건 바로 '건강수명'입니다. 건강수명은 평균수명에서 질병이나 부상으로 몸이 아픈 기간을 제외한 것으로 단순히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실제로 건강하게 산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를 나타내는 건강지표로 선진국에서는 평균수명보다 훨씬 중요하게 인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기준으로 한국의 건강수명은 남성 기준 71세, 여성 74세라고 합니다. 평균수명이 83세이고, 건강수명이 71세이면 무려 12년 동안이나 질병 및 부상 등으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한 마디로 71세를 넘어 노후 생활을 하면 계획했던 각종 버킷리스트, 즉 여행과 식도락, 취미 및 배움 활동, 새로운 도전과 체험, 지인과의 모임, 사회봉사 등의 활동에 상당한 차질이 생긴다는 뜻이죠. 제 부모님이나 주변 어르신들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분들의 얘기를 들어본 결과 공통점은 70대가 넘어가면 뭘 해도 예전만큼 기력도 없을뿐더러 재미도 없고 즐겁지도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결론은 건강 수명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로 재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현재 오십 대 중반이니 현재 기준의 건강 수명을 고려하면 남은 기간은 15년 정도였죠. 갑자기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게 15년이면 생각보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죠. 그래서 저는 위의 두 가지 질문인 얼마를 모으면 이 고단한 삶의 쳇바퀴를 멈출 수 있는가, 얼마 남지 않는 짐 보따리로 어떻게 노후 생활을 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우답(愚答)을 제 나름대로 내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돈 버는 데 더 이상 내 삶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그리고 죽기 전에 다 쓰고 죽자(Die broke)였죠.
결과적으로 현재 제가 가진 얼마 되지 않은 짐 보따리 정도로 고단한 삶의 쳇바퀴를 더 이상 굴리지 않고, 그 짐 보따리로 죽기 전까지 다 쓰고 장렬하게 가자로 정한 것이죠.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나약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현재로선 그냥 담담하게 남은 삶의 방향을 제 생각대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조금은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입니다만 현재로선 이게 최선이란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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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스테판 폴란과 마크 레빈의 《다 쓰고 죽어라(Die Broke), 1997》란 책이 이런 결심을 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저자는 폴란드 부동산 사업가로 출발해 금융권 대표로 돈도 많이 벌고 명성도 얻은 시점에 어느 날 폐암 판정을 받게 됩니다.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 추가 검진을 하던 중 오진이었음을 확인하고 그는 자신의 남은 삶을 완전히 바꾸게 되죠. 바로 모든 자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말고 후회 없이 다 쓰고 죽겠다는 결심을합니다.
이 책을 읽은 후 저는 생각이 조금은 굳어진 것 같았습니다. 만약 제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면 돈을 벌겠다고 용을 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당연히 얼마 되지 않은 자산을 처분해 공기 좋고 물 맑은 조용한 시골에서 남은 여생을 스트레스 받지 않고 힐링하며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중대 핵심 사건이 닥치기 전에 저는 미리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이죠. 앞으로 구체적인 삶의 계획은 저의 노후 버킷 리스트를 참조해서 수립할 예정입니다.
언론에서 저희 세대는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고, 자식들에게 버려지는 첫 세대라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찍부터 자녀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으니 성인이 되면 스스로 자립하라고 엄격하게 교육을 해왔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죠. 만약 지식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다면 남은 노후의 삶은 조금은 부담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제가 원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잘 계획해서 실행만 하면 되니깐요.
만약 그 이후에도 여유가 있으면 자녀들에게 또 손주들에게 뭔가를 해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손주들 등록금을 대신 내주고, 자식들과 함께 가족 여행을 한다면 조금 폼 나게 가족 여행 경비를 대신 내주는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며느리와 손주들 용돈을 빼먹지 말아야겠죠. 죽고 난 다음에 자식들에게 뭔가를 남기는 것보다는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는 가족들과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을 많이 쌓아가는 것이 어쩌면 남은 삶을 후회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모 재산이 자신들 재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식들 또한 올바른 자립심과 경제관념이 생길 테니 스스로 삶을 헤쳐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과 역량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돈보다는 돈에 대한 건전한 철학을 자식들에게 남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무조건 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남은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고, 자녀들 또한 부모들의 삶을 보면서 똑같이 살아야지라고 생각할 테니 삶의 선순환이 이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생은 앞만 보고 달리는 경마 경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의 삶과 비교해서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를 남겨줄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으면 남과의 비교와 타인의 시선 등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기다 가면 되는 것이죠. 얼마를 벌었고, 얼마를 가지고 있느냐로 평가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아니라 함께한 소중한 추억과 기억을 유산으로 남겨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고 돈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모은 돈을 살아있는 동안 가족들을 돕고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될 겁니다.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는 매년 수조 원씩 기부하고 있으며 자신이 죽은 다음에 최소한의 재산만 가족들에게 남기고 나머지는 사회에 기부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물론 워낙 큰돈을 가지고 있으니 남긴 돈은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삶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거창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멈출 수 있는 용기와 다 쓰고 가는 지혜만 있으면 된다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