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

by 도리

내가 올라타자 엘리베이터문이 닫히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사람은

지금까지 반가운 말투와는 다르게 목소리를 깔며 말을 하기 시작했어.


"XX대부에서 실사 방문차 나왔습니다. 전화는 왜 안 받으세요?"

"아..."


갑자기 바뀐 그 사람의 분위기에 순간 할 말을 잃었어.

설마 설마 했지만 회사까지 직접 찾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거든.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자 그 사람은 마치 친한 사이인 것처럼

다시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회사건물 옆 골목으로 나를 이끌었어.


"담배 피세요?"

"네..."


담배를 핀다는 아빠말에 그 사람은 담배를 꺼내 자기 입에 물고

불을 붙이고는 내게 담뱃갑을 내밀었어.


"아.. 전 제 걸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피자 그 사람은 인상을 쓴 채로

날 쳐다보며 물었어.


"담배 사실돈은 있으신가 보네? 이자낼 돈은 없으시고?"

"그게..."


떨리는 손,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어떻게 서있는지 모를 정도로

다리도 후들거리는 상황에서 말이라도 제대로 나오겠니?


아빠를 훑어보던 그는 아빠가 두려워하고 있는걸 눈치챘던 것 같아.

미간을 더욱 찌푸리고 약간은 위협적인 모습으로 담배연기를 아빠 얼굴 쪽으로

뿜으며 얘기했어.


"아니~ 사람이 똥간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다르다고

이렇게 신뢰를 저버려서야 되겠냐고"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 들을려고 내가 여기까지 왔는 줄 알아요?

빨리 돈 주세요. 오늘 갈 곳도 많은데 언제까지 여기 묶어 놓을 거예요?"


그는 손바닥을 내게 펴 보이면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어.

얼른 돈을 줘 보내고 싶지만. 어제 음식물쓰레기봉투와 소주를 사는 바람에

아빠통장엔 만원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거든. 전재산이 말야.


"제가 돈이 없어서..."

"하씨.. 꼭 돈 달라 그러면 없다 그런단 말이지. 어디서 배우나?

밥 사 먹고 담배 필돈들은 있으면서 갚을 돈은 없다? 이거 사기 아닙니까?"


"진짜 없어요"

"얼마 있는데요? 있는 것만이라도 줘봐요."


"만원...정도?"


만원 정도밖에 없다는 아빠말에 그 사람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며 화를 내며 말했어.


"만원? 지금 장난합니까? 직장인이 전재산이 만원이라면 누가 믿어요?"

"진짜예요... 잔액 보여드릴 수 있어요..."


"아니 그럼 친한 직원 없어요? 빌려서 내면 되잖아? 당신이 잘하는 거잖아

돈 빌리는 거"


마치 때리기라도 할 듯이 나에게 성큼 다가오며 따지듯 물었어.

그때였어.


"야! 도리 여기서 뭐 해?"


소리 난 곳을 쳐다봤을 때 그곳엔 정현이가 서있었어.

울고 싶었지. 숨고 싶었고. 정말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킨 것 같아서

마치 알몸이라도 보인 것처럼 수치스럽고 창피했어.


정현이는 나와 그 사람을 번갈아보면서 더 가까이 오며 물었어.


"어? 뭐야? 거래처라며?"

"그게...사..."


뭐라고 설명하지? 어떻게 돌려 얘기하지? 대부업체에서 연체 때문에

돈 받으러 왔다는 말만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겨우 입을 떼는데 그 사람이 내 말을 자르고 얘기했어.


"누구에요? 친구? 빌려준 돈 있어서 받으러 왔어요. 혹시

도리씨 돈 빌려줄 생각 없어요? 내가 지금 바빠서 가봐야 되는데"

"헙!"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비아냥 거리듯이 얘기하는 그 사람 얘기를 듣던

정현이는 눈이 커지면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는 뭔가 생각하는듯 하더니

갑자기 뒤를 돌아 뛰어가 버렸어.


그 사람은 그런 정현이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침을 한번 퉤 뱉고는 다시 아빠에게 말했지.


"뭐야 도리씨 인간관계 다시 쌓아야겠네 그냥 도망가버리네?"


아빠는 어쩌면 기대했는지도 몰라.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정현이가

'얼만데요!'라고 따져 물으며 빌려 주기를 말야.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어.

서운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아닌데 씁쓸한 감정만은 남아서

정현이가 들어간 방향을 쳐다만 보고 있었지.


"에? 사람얘기하는데 쳐다보지도 않네? 아 돈 달라고요"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나와, 돈 달라는 소리만이 골목을

채울 때쯤이었어. 골목 끝에서 고막을 찢을듯한 가늘지만 크고

높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어.


"당신 뭐야?"

"뭐야? 증식했네? 친구 데리러 간거였어?"


소리가 난 곳을 다시 쳐다봤을 때. 거기엔 민예서 차장 그러니까 사차장과

정현이가 함께 서있었어. 조금 화난 표정으로 말이지.


그는 했던 얘기 또 해야 하나 라는 표정으로 귀찮은 듯이


"아니 이 사람이 돈을 빌.."

"당.신.뭐.냐.고."


얘기를 하는 그의 말을 막고 사차장은 5보 정도 떨어졌을 정도의 거리만큼

성큼 다가가서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그리고 차갑게 얘기했어.


그런 사차장의 태도와 기에 살짝 눌렸는지 잠깐 멈칫 하던 그는

이내 다시 당당한 태도로 말하더라.


"아니~ 당신이라니~ 그러는 당신은 누구신데요?"

"거기 당신이 괴롭히고 있는 애 상사인데, 당신 뭐야? 깡패야?"


따지듯이 묻는 사차장의 말에 그 사람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을 내비쳤지만

이내 다시 인상을 쓰며 약간 거들먹거리는 말투와 행동으로

대화를 이어갔어


"나요? 채권자."

"어디 업체 누군데? 사원증 좀 봅시다?"


사원증을 보자는 소리에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당황하며 주머니를 뒤지는 그에게 사차장은 한 번 더

쏘아 붙이기 시작했어.


"당신 지금 남의 회사 업무시간에 내 직원 데리고 뭐 하는 거야?

이거 업무 방해야 몰라?"

"아니~"


"그리고 정식대부 맞아? 채무자 채무사실을 주변사람에게 알리게 돼있나?

어떻게 해줄까? 경찰을 불러줘? 금감원에 민원을 넣어줘?"


일이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단 걸 느낀 건지 그 사람은 처음 아빠를 만났을 때처럼

살살 웃으며 얘기했어.


"아이고~ 사모님. 수고스러우시게 뭐 그렇게까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불법추심이야! 다신 찾아오지 마요."


멋쩍게 웃으며 서있는 그. 화를 내며 따지고 있는 사차장,

그런 사차장 옆에 딱 붙어있는 화난 표정의 정현이.

그리고 보고 있는 것 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상상이 되니? 그날 그 골목의 모습이 말야.

그 사람은 이게 다 나 때문이란 듯이 화난 표정으로 날 쏘아봤어.


"뭐해요! 당장 가라니까?"


다시 한번 사차장이 소리치자 그 사람은 나와 사차장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분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고는 자리를 뜨기 시작했지.


"하~나 도리씨 전화 좀 받아요.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그 한마디 남기고 말이야.

그가 떠난 자리에는 사차장과 정현이 그리고 나만 남은 채

어색한 공기만이 흐르고 있었어.


잠시 후.


사차장은 회사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지.

그런 그녀에게 아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얘기했어


"감사..합니다.."


어렵게 내뱉은 아빠의 감사인사에 너무 고맙게도 사차장은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무표정으로 아빠를 바라보다가

정현이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했어.


"뭐가? 참! 정현아 졸려 죽겠다고 커피 사달라며?"

"응 언니! 나 크림라떼 크림왕창 올려서"


정현이도 마찬가지였지. 그 사람이 누구냐, 회사엔 왜 온 거냐,

너 뭘 하고 다니는 거냐 같은 질문은 하나도 없이.

그냥 커피 사러 가다가 골목을 지나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처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화를 이어갔어.


"너 내가 회사에서는 차장님이라고 부르랬지!"

"아따거! 알았다고요... 근데 여긴 회사밖인데...요?"


정현이의 팔을 손바닥으로 툭 치는 사차장과 장난스럽게 반응하는

정현이. 그녀들은 그렇게 골목을 나서고 있었어.

순간 정현이가 뒤를 돌아 아빠 쪽을 쳐다보며 말했어.


"도리야 너도 갈래? 언니가... 아니아니 차장님이 사주신데!"

"아냐 난 괜찮아"


자격지심에서였을지도 모르겠는데 웃는 정현이의 얼굴에서

잠깐이나마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정현이의 표정을 그때 본 것 같아.


'너 괜찮아?'


라는 표정 말이지.


모두가 떠난 그 골목에서 담배를 얼마나 피워댔는지. 목이 따갑고

숨쉬기가 버거워질 때쯤 정신이 훅들었어.


'얼마나 나와 있었지?'


시계를 보니 어느덧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있었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또 욕먹겠다는 생각에 사무실로 향했지.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형들이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라는 생각이었어.

내가 그 사람과 상담실에서 만나 같이 나간 것까지 모두 봤으니

분명 물어볼 테고 거기다 있지도 않은 계약건을 들먹였으니 말야.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전화벨소리,

통화하는 소리, 바쁘게 부서와 부서를 오가는 사람들로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똑같더라고


내 자리로 와서 앉으려는데


"왔냐? 아까 너 자리 비웠을때 마케팅 팀장님이 기획안 수정본이라고

가져오셔서 책상 위에 뒀다? 확인해 봐"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선물은?"

"네?"


"또 없어? 너무하네 진짜"


묻지 않았어 아무것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알진 못하더라도

대충 감으로 느껴졌을 거고 궁금했을 텐데 말야.


"야! 그거 나 한 모금만..."


앉으려고 의자를 빼는데 경태형이 내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어.

경태형이 가리킨 곳에는 누가 갖다 놨는지 테이크아웃 한 커피가 있었고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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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진짜 맛있더라.

졸릴 땐 커피만한게

없지~ㅇㅈ?

- 정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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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이가 두고 간 커피였어. 고마우면서도 알 수 없는 복잡한 마음에

몸이 떨리기 시작했어.


"어? 야 아까우면 안 줘도 돼"

"아니에요 컵 주세요 따라드릴게요"


그날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단다.

그때 그 포스트잇? 지금도 아빠 지갑에 부적처럼 넣고 다니지.


아빠가 힘들 때, 곤란할 때, 어려울 때 이 부적이 그때 정현이와

사차장이 그랬던 것처럼 혹시 날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그들에 대한 그리운 마음에 말야.


정현이는 ... 잘 살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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