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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리 Oct 26. 2022

할머니의 자개장

친정에는 맛이 있다. 옛 물건을 발견하는 맛. 친정에는 내가 어릴 적 함께했던 물건들이 남아 있다. 옛 물건을 마주하면 그 시절을 회고하게 된다. 바쁘게 살면서 '앞'만 생각하던 나에게 지나간 '뒤'를 바라보는 경험은 꽤나 생경하고 신선하다. 친정은 세 번 정도 이사를 했다. 친정엄마는 이사를 하면서 물건을 많이 버렸다고 하는데, 그래도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남아 있는 물건들이 있다. 그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물건도 왕왕 있다.



지금 친정집은 새 아파트에 살고 있기에 전반적으로 세련된 무드로 인테리어가 갖춰져 있다. 그런데 안방만은 들어가자마자 언밸런스함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데, 바로 자개장 덕분이다. 까만 바탕에 촘촘하게 수놓아진 자개가 반짝거린다. 한 벽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자개장은 꽤나 위엄이 있다. 자개장 앞에 서면 마치 자개장이 나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든다. 내 기억 속 자개장은 항상 우리 집에 있었다. 어린이었던 내가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보다 키도 크고 웅장하다. 자개장의 위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세 번을 이사하면서도 살아남은 그 질긴 생명력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내 기억 속 우리 집엔 늘 이 자개장이 있었다. 이 집의 터줏대감으로 늘 한쪽 벽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엄마, 이 자개장 엄마가 혼수로 해온 거예요?"

"아니지, 할머니가 산거야. 할머니 꺼야."

이럴 수가. 난 여태껏 이 자개장이 엄마가 결혼하며 혼수로 해 온 건 줄 알았다. 엄마의 혼수였다면 나보다 두세살 많은 거다. 그런데 할머니가 산 것이었다니. 심지어 엄마도 할머니가 언제 산 건지 모른다. 도대체 자개장 너의 나이는 몇 살이란 말이냐.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의 공간이었던 안방에는 벽면에는 자개장이 있었다. 베란다를 바라보는 창가에는 자개경대가 있었다. 어릴 적 나는 가까이서 자개장과 자개경대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자개장은 빼곡하게 자개로 수놓은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나무, 연못, 새, 꽃, 사람까지. 흥부와 놀부가 박 터뜨리는 것이 자개로 수놓아져 있다. 자개장을 보는 것은 마치 내게 그림책을 보는 것과 같았다. 문짝마다 다른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글은 없어도 이야기를 품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친정에 놀러 가면 아이들도 생전 처음 보는 번쩍거리는 것에 꽤나 흥미를 보인다. "엄마 이게 뭐야?" 다가가서 그림을 자세히 살피기도 한다. 자개장 그림의 디테일함에 다시 놀라 도대체 이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궁금증이 생겼다. 검색해보니 이것이 나전칠기이며,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손으로 작업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공장에서 찍어 나올 수가 없는 섬세함이다.



레트로가 세상 힙한 것으로 취급받는 세상이다. 레트로를 컨셉으로 밀면 가게던 컨텐츠던 대박은 못 쳐도 중박은 친다. 올해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도 그러했다.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레트로풍 식당 간판이 자주 보인다. 이 자개장이야 말로 레트로 오브 레트로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자개장을 검색하면 '자개장 인테리어'가 연관검색어로 뜬다. 인테리어에 레트로 감성을 한 스푼 끼얹기 위해 자개장을 활용하는 것이다. 친정집 안방의 자개장이 언밸런스하다고 느꼈는데, 이 언밸런스함이 인테리어가 될 수 있다니. 자개장을 활용한 인테리어 사진을 보면 꽤나 멋스럽다. 아마 소정의 리폼을 통해 모던한 인테리어에 잘 어울리게 약간 손보았으리라. 

자개장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을까? 유행은 돌고 돌며, 옛 것이 멋스럽다고 추앙받는 세상이다. 친정집 자개장의 끈질긴 생명력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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