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로의 아픔을 기억하는 곳

사찰기행-5.18민주화운동기록관

by baekja

전의 글에서 금남로를 설명할 때 별 느낌 없이 설명했지만 지하철역에서 나와 금남로를 처음 보자마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사학도로 거의 매일 들어왔던 광주민주화운동의 중심지이며 그 앞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던 전남도청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강남대로와 같은 8차선 이상의 큰 도로를 생각했던 저는 4차선 정도의 도로를 보고 놀랐습니다. 직접 와서 보고 느끼고 배워야한다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한 말이겠죠. 광주에 오지 않았다면 저는 영원히 제대로 된 금남로의 모습을 가지고 역사의 한 장면을 그려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금남로를 잠시 바라보다가 바로 기록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미 호우경보가 떨어진데다 시간이 이미 늦은 오후 4시 반이어서 그런지 로비에는 사람하나 없었고 안내 데스크에만 두 분이 계셨습니다. 가방을 맡기고 오후 4시 반에 있는 도슨트 설명을 물으니 바로 한 분이 일어나셔서 설명을 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인 인권기록유산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을 소장 보관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여기에 기록된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아, 만들어진 곳이라고 하면 오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가톨릭회관으로 쓰이며 학생들의 연좌시위가 있었던 건물 자체만으로도 5.18민주화운동의 사적지가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로비에도 당시의 총탄이 박힌 유리창이 전시되고 있지요.


도슨트 설명은 1층부터 차례로 시작되었습니다. 1층은 5.18민주화운동의 항쟁을 중심으로 시5.18민주화운동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며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내용을 전체 설명하고자 한다면 저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설명부터 상세히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설명은 후에 할 5.18광주민주화운동 답사를 생각하며 미뤄두기로 하고 전시관에서 인상적이었던 몇 부분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시관에서 몇 가지 재현해 놓은 부분이 있었는데 첫 번째로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당시 금남로의 모습을 묘사해둔 것이었습니다. 탄피가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유혈이 낭자하며 피 묻은 신발이 주인 잃은 채로 굴러다니는 금남로는 방금 제가 본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강렬히 제 머리에 남았습니다. 아무 일 없이 걸어 다니고 버스와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길이 40년 전엔 이런 길이었던 적이 있었겠구나 싶었습니다. 분명 그 때의 날씨는 맑았고 오늘의 날씨는 흐리다 못해 비가 폭포수처럼 내리고 있었지만, 심정은 그 때가 더욱 참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주화라는 어쩌면 추상적인 이상을 위해 현실의 목숨을 걸어야 했던 현실이 더욱 아리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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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넘어가자 이번엔 한 수레에 짚으로 된 멍석이 덮여 있는 전시관이 나왔습니다. 수레의 밖으로는 피 묻은 발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시체를 묘사해 두었더군요. 참혹했습니다. 얼굴이 절로 찡그려지고 마음은 매우 무거워졌습니다. 누군가의 발은 신발조차 없었습니다. 아마 금남로에 버려져 뒹굴고 있는 신발 중 하나가 그 사람의 것이었을 겁니다. 뒤이어진 설명은 더욱 서글펐습니다. 시체의 가족조차 찾지 못해 버려지거나 가족을 찾기도 전에 버려져 신상조차 알 수 없는 시신들이 매우 많았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죽어 간 사람들도 그 아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조차도 너무 깊게 남아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층의 전시관은 5.18민주화운동의 기록에 관한 전시관이었습니다. 아래의 전시관이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 주었다면 위에서는 상세한 정보를 전달해주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상세한 전개과정과 더불어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의 복제본과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와 소설 등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인상 깊은 전시물은 초등학생들의 기록이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이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몰리고 덮일 위기에 처하자 학교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해 둔 것이었습니다. 총소리가 밖에서 들리고 함성이 가득해 무서웠다는 초등학생들의 기록을 보고 있으니 당시 광주 전역의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집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을 초등학생조차 그 삼엄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으니 5.18민주화운동이 광주 전역에 남겼을 상처를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며 2층에서 도슨트가 마무리되었고 저는 빠르게 3층과 6층의 남은 전시관을 살펴보러 갔습니다. 3층에는 기록물을 보관하고 있는 수장고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고 5.18민주화운동기록물과 더불어 세계기록유산 중 인권기록유산으로 기록된 세계의 기록들의 복제본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그나 카르타(영국의 대헌장), 인간과 시민에 관한 권리 선언(프랑스 혁명), 카리브해 지역의 노예 관련 기록유산, 난징대학살 기록물, 발틱웨이(독소 비밀협약에 관한 발트3국의 추궁), 필리핀 피플파워 라디오 방송, 투오슬렝 학살 박물관 기록물(캄보디아 킬링필드), 넬슨 만델라 등에 대한 공소문 등 다양한 기록유산의 복제본이 있으니 관심이 있으시면 유심히 보기를 바랍니다.


제가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말하면서 이곳이 예전에 가톨릭회관이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시나요? 6층은 윤공희 대주교의 집무실이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청년들이 가톨릭회관에서 시위하는 것을 허락하고 시위가 격화되어 시위대가 가톨릭회관을 빠져나가고 나서 5월 19일 회관 앞에서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을 목격하고 명동 서울대교구청으로 나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서 계엄군의 만행을 폭로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미국대사, 계엄사령관, 전두환을 만나 이를 말려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결국 처참한 진압 이후 5월 27일에 5.18민주화운동이 끝을 맺었고 윤공희 대주교는 광주대교구 사제들과 <광주사태의 진상>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조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들보다 그가 나중에 내뱉은 자기고백적인 말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5월 19일 이곳 6층 집무실에서 창밖으로 내려다 본 골목에서 계엄군에게 폭행당한 젊은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응급조치를 취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두려워서 실천하지 못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기고백을 할 줄 아는 그는 진정한 고해성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랬기에 5.18민주화운동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실천에 나섰겠지요.


시간이 늦어 천천히 제대로 살펴보지는 못하였지만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제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지금은 생생한 기억의 역사 중 하나인 5.18민주화운동이지만, 이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역사가 됐을 때를 대비하여 하나하나 준비를 해둔 5.18민주화운동의 아카이브에 가까운 인상이었습니다. 상세하고 객관적인 기록뿐 아니라 생생하고 감동적인 전시물들까지 5.18을 아주 잘 기록하고 기억하고 있는 장소였습니다. 대충 보았는데도 벌써 한 시간이 지나 오후 5시 30분이 되었더군요. 마침 바로 옆에 있는 5.18민주화운동 사적지인 전일빌딩이 7시까지 한다고 하여 바로 가방을 매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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