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유난히도 무더웠던 이번 여름, 아직 여름이 채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입추에 들어서인지 더위는 한풀 꺾였습니다. 에어컨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고, 열대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닌 여름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열대야가 단 하루도 오지 않는 지역이 대한민국에 있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습니까? 당장 며칠 전에 최저 온도가 15도를 찍은 대단한 지역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매우 추운 장소 중 한 곳. 바로 평창군입니다.
저는 이 평창군에서 지금 5개월째 자취 중입니다. 시원하고 선선한 공기를 마시며 수도권에서 만끽할 수 없었던 시골의 정경을 온몸으로 얻어가는 중이죠. 한창 일해야 할 젊은 나이, 돈도 없는 한 청년이 이곳을 오게 된 이유는 여행이나 휴식은 아닙니다. 나이에 맞게, 현 상황에 맞게, 일하러 왔습니다.
서울의 2.5배나 되는 이 평창군의 인구는 약 4만 명 정도입니다. 차가 막히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고, 사람이 많아 기다린다는 말도 이곳에서는 찾기 힘듭니다. 다만, 몇몇 관광지는 휴가철마다 사람이 몰리기도 하죠. 이 조용한 평창군에서 저는 진부면에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처음 들었을 지명. 몇몇이 진부면을 들어보셨다면 대부분 유명한 산 덕분일 것입니다. 오대산,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국립공원이자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의 정상, 비로봉으로 향하는 입구가 바로 진부면에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하러 왔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농사를 지으러 왔는지, 아니면 산을 타러 왔는지 헷갈리시기만 할 겁니다. 저는 인턴을 하러 왔습니다. 정확히는 공공기관 청년인턴이죠. 제가 속해있는 공공기관은 국가유산청입니다. 옛 이름으로 문화재청이라 불리는 이 국가유산청이 평창군에 가지고 있는 기관의 이름은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입니다. 이런 박물관이 있는지조차 모르시는 분들이 태반일 겁니다. 사실 저도 지원하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평창에 있지만, 무려 경복궁 옆 국립고궁박물관의 산하 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의 위치를 보면 더 가관인데 진부면 중심지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대산 국립공원 입구에 있습니다. 이 오대산 앞 박물관에서 저는 지금 학예보조로 청년인턴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평생 와보지도 않을 이곳에서 여행 같은 일상을, 혹은 일상 같은 여행을 경험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은 지독히 외롭고, 어느 날은 세상이 다 나에게로 오는 듯 즐겁습니다. 느릴 것만 같은 시골 마을은 사실 누구보다 급하고, 정신없기도 합니다. 시골 마을의 국립 박물관이라는 애매한 장소성은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왔으나 종종 시골에서 살았고, 시골에서 살고 싶었던 이중적인 저의 특성과 뒤섞여 제 삶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엮어 내었습니다.
조금은 지루하고, 조금은 유쾌하고, 조금은 외로우면서, 조금은 정이 넘치는 제 인턴 생활을 써내려 가고자 합니다. 어느 날은 강원도로 여행을 온 여행자처럼, 어느 날은 외지인인 친구를 여행시켜 주는 가이드이자 민박집 주인처럼, 어느 날은 박물관에서 일하는 인턴처럼, 어느 날은 산골의 한적한 주인처럼 살아가는 제 이야기가 제 삶에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발자취를 기록하고자 합니다. 기록의 과정에서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제 삶의 한 자락을 같이 느끼며 조금은 쉼과 위안을 얻으셨으면 합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늘, 시간을 거슬러 눈이 한가득 쌓여 있는 3월의 어느 날을 떠올리는 걸로 기록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