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오기 전부터 나는 안개 낀 날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전에 보던 풍경이 공기에 가득 스며든 물방울들로 인해 사라졌다 드러나는 그 풍경을 정말 좋아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 종종 볼 수 있던 그 날씨는 중학교 때는 전혀 볼 수 없었고, 고등학교가 산에 위치한 덕에 십대의 후반 때는 종종 볼 수 있다가 대학교 때는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백령도에 발령을 받고 인천의 부대에서 기다릴 때 안개가 자주 낀다는 이야기는 내 맘 깊은 곳에서 반가움을 끌어내었다. 백령도에 도착했을 땐 섬 자체가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처음 와보는 미지의 섬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켜주어 정말 내가 알지 못하던 공간으로 넘어왔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안개 낀 날씨로 시작한 백령도의 인상은 1년 동안 지내면서 수많은 날씨들을 통해 변화했고 그 변화하는 모습들에 가끔은 좋아하고 가끔은 짜증내며 군생활을 해왔다. 안개 낀 날, 바람 불고 흐린 날, 비 오는 날, 번개 치는 날, 눈 오는 날, 맑은 날까지 지난 일 년 간 내가 받아왔던 인상 그리고 겪었던 경험들을 약간만 소개하고자 한다.
처음 소개할 날씨는 안개 낀 날이다. 해무, 즉 바다 안개가 봄부터 여름까지 내내 끼는 걸 볼 수 있는 백령도는 말 그대로 안개의 천국이다. 거기에 요새는 중국에서 넘어오는 다량의 미세먼지로 인해 겨울에도 안개가 끼는 기현상이 일어나면서 사계절 내내 안개 끼는 걸 볼 수 있게 되었다. 안개는 내가 봐왔던 모든 것들이 다르게 느껴지게 만드는 신비한 날씨다. 투명한 물방울들이 다량으로 모여 하얀색에 가깝게 배경을 칠하면서도 가끔은 뒤에 있는 물체를 보여주는 투명함으로 우리의 시각적 인식 자체를 뒤바꿔 놓는다. 또한, 공기에 있는 물방울들이 느껴져 마치 자연에서 피부에 보습을 하는 귀중한(?) 경험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학교와 군생활 등 늘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에 이런 안개로 인한 일상의 변화가 나타나면 속으로 나는 쾌재를 부르고는 했다. 그리고 안개가 심한 날에는 바로 앞의 물체가 보였다가 얼마 걸어가면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마치 무에서 유가 되었다가 결국은 무로 돌아가는 덧없는 우리 인생을 보여주는 것 같아 쓸쓸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신비한 체험들이 있음에도 안개를 되게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때가 있는데 바로 휴가 나가는 날이다. 휴가 나가는 날 안개가 짙게 끼어 배가 통제를 당하면 양반이고, 대기를 하다가 오후 3시 이후에 뜨면 말 그대로 휴가를 하루 날리는 꼴이라 정말 휴가 나가는 날만큼은 간절히 안개가 끼지 않기만을 바란다.
이런 안개를 날려버리는 바람이 종종 불어 운 좋은 사람들을 휴가를 보내 주곤 한다. 백령도는 섬인지라 바다에서 오는 바람이 자주 부는 편인데 불기 시작하면 꽤 강하게 불어 여름에는 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겨울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느끼게 만드는 애물단지다. 50knot의 강풍이 불던 저번 어느 겨울날은 그 위험으로 순찰까지 취소되었는데, 군견의 생사 유무를 확인하러 가던 중 앞에 있던 바람에 날아가는 후임의 모자를 받아준 기억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런 겨울날의 바람을 맞다보면 사람의 옷을 벗기기 위해서 가장 세찬 바람을 불었다는 옛날 동화의 바람은 옷을 벗기진 못했겠지만, 최소 사람을 중태에는 빠지게는 했을 거란 엉뚱한 생각도 하곤 한다. 쨌든 이런 백령도의 강한 바람도 좋은 점은 있다. 여름엔 더위를 식히는데 도움을 주고, 강한 바람을 맞을 때면 마치 내가 살아있는 듯한 감각을 주기 때문이다. 빠른 공기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역동성과 그 강렬한 촉각적 느낌은 군대의 반복된 일상에서 내가 근무하는 기계가 아니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역시 휴가 나가는 날은 바람이 안 불기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저번 겨울 12월에 바람으로 인해 통제가 5번이나 연속으로 되는 진풍경을 보면서 휴가 5일 밀린 사람은 얼마나 괴로울까라고 생각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휴가 나갈 때 바라지 않는 날씨로 한 가지가 더 있다. 비오는 날이다. 비 자체는 운항에 크게 문제를 주지 않지만, 공기에 습기가 많아 안개가 끼기 쉽고 바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아 통제가 걸리는 경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가 오면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기 때문에 반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비가 많이 오면 순찰도 취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주 좋아한다. 순찰함에 순찰 카드가 젖어 찢어질 정도가 되면 그 즐거움도 사라지지만 견사 청소를 안 해도 된다는 한 가지 좋은 점이 더 있기에 넘어간다. 그리고 비 오는 날도 매우 좋아한다. 예전에 중학교 사춘기 시절에는 비 맞으며 세상 혼자 우울한 것처럼 걷거나 스트레스 풀겠다고 비 맞으며 혼자 축구 연습 하던 걸 즐기던 이상한(?) 시절이 있었다. 뭔가 그런 우울함의 끝을 느끼며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할 때면 카타르시스 비슷한 것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지금도 가끔 우의를 안 입고 비 맞으며 순찰을 돌 때면 그런 옛날이 생각나 몰래 웃음 짓는다. 물론 지금 비 맞으며 순찰을 도는 건 위의 그런 이유는 아니다. 비를 맞으면 쏟아지는 빗줄기가 내 몸을 하나씩 건드리는 그 감각과 비 올 때만 맛볼 수 있는 그 시원한 감각을 즐기며 가끔 우의를 벗어던지고 순찰을 돈다. 늘 똑같은 일상,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이 군부대에서 비를 맞는 일탈 행위가 주는 기쁨과 같은 소심한 반항적 심리도 빼 놓을 수 없는 비 맞는 즐거움 중 하나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종종 화가 난 고대의 신이 창을 던지는 데 바로 번개다. 예전부터 강력한 힘을 상징하며 태초의 인간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번개는 여전히 인간에게 자연의 힘을 과시한다. 고등학교 때는 학교 바로 앞에 번개가 떨어져 인터넷과 공중전화가 다 먹통이 되는 경우도 보았고, 작년에 번개가 백령도 근처에 떨어졌을 때는 해병대에서 관련 기기 몇 가지가 망가지는 사고도 있었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기에 뇌우, 즉 번개가 예고되면 모든 전자기기들을 껐다 켜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CCTV가 꺼지면 취약지역을 지키러 내가 출동해야하기 때문에 아주 고역이다. 생활관에서 자고 있을 때는 천둥을 동반하면 그 큰소리로 잠을 다 깨우고 번개로 눈에 강렬한 빛을 쐬게 해 두려움 후에 짜증을 불러오기도 한다. 어쩌다 한 번 초소에서 번개를 맨 눈으로 보게 된 적이 있는데 마치 나뭇가지처럼 생긴 커다란 빛의 창이 바다에 꽂히는 모습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경외와 놀라움을 느끼며 과연 옛날 사람들이 신의 분노라 생각할 만하다고 느꼈다. 이렇게 자연의 강력한 파괴력까지 느끼고 나면 자연이 온 세상을 가려버리는 겨울이 온다.
겨울하면 생각나는 날씨는 단연 눈 오는 날이다. 백령도는 눈이 엄청 안 오는 편이다. 작년에도 눈이 별로 오지 않아 안타깝다는 느낌과 제설작업에 불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공존했다. 하루는 CCTV에 보이는 눈이 살짝 덮인 하얀 부대 정경을 보면서 행복해 하고 있었는데, 저 동쪽의 울릉도는 적설량이 100cm가 넘는다는 소리를 듣고 기겁했다. 일과 내내 눈만 치우는 걸 일 년마다 해야 한다는 울릉도와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좋은 백령도임에 행복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도 했던 제설이었기에 모래 뿌리고 넉가래로 미는 제설은 특이할 게 없었지만, 차량 바퀴에 체인을 치는 것은 되게 신기하게 바라봤다. 버스 체인은 바퀴 당 한 20kg 된다고 하니 수송반의 고생을 보면서 몇 안 되는 공군의 3D업종 헌병의 상대적 박탈감을 만회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좋은 점 말고도 최고의 좋은 점은 아름다운 부대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획일적이고 효율적으로만 지어진 인간의 건물들이 자연의 위대한 힘에 하얀 물감으로 칠해지면서 하나하나 덮어져 사라지는 그 모습은 정경情景 그 자체다. 이런 정경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건 생활관에서 대대본부 올라가는 계단 양옆으로 나뭇가지에 눈이 모두 소복이 쌓이고 회색 콘크리트의 계단마저 눈으로 하얗게 다 덮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아직 절경絶景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아름답지만 차가울 수 있는 이 하얀색의 풍경에 가로등 전구의 주황빛이 내려 쬐며 따뜻함을 더함으로써 그 장면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하얀색과 주황색 그리고 거기에 대비되는 까만 밤하늘까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그 경치는 내가 본 부대의 풍경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였으며 전역하고도 잊지 못할 풍경 중 하나이다.
내가 아직까지 설명하지 않은 날씨가 있다. 한국에서 가장 흔한 날씨 중 하나이며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희망의 상징 같은 날씨다. 너무나 흔해 가끔 너무 오래 지속되면 다른 날씨를 원하기도 하지만, 제일 흔하고, 제일 위험하지 않으며, 제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기에 가장 싫어하는 날씨는 될 수 없는 정말 평범한 날씨다. 하지만, 동화 <파랑새>에 보면 파랑새를 찾아 나섰다가 모험 끝에 돌아온 집에서 파랑새를 찾을 수 있었듯 사실 가장 우리에게 소중한 날씨일지 모른다. 봄에 만개하는 각종 꽃들과 연녹색의 싱그러운 잎들은 햇빛 아래에서 볼 때 그 색을 가장 화려하게 자랑하며, 여름의 물놀이도 햇빛 아래에서야 안전하게 할 수 있다. 가을의 단풍도 청명한 하늘과 어우러져야 그 맛을 즐길 수 있으며, 겨울의 맑은 날에 내리쬐는 햇살은 추운 겨울 우리 몸을 녹여주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맑은 날이 계속 되는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짜증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살아 숨을 쉬고, 이 모든 감각들을 느끼며, 이성으로 생각하고, 감정을 일으키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 해 즉, 태양이며 이 요소가 가장 힘을 발휘하는 날이 맑은 날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소중한 날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맑은 날에 볼 수 있는 풍경 중 가장 좋아하는 건 바로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저녁이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걸 보며 “요샌 CG로 저런 것도 되는구나.”라며 감탄했던 어리석은 나에게 저게 실제로 존재함을 보여준 정말 아름다운 맑은 날의 하늘이었다. 바다의 푸른빛과 아직 채 변하지 못한 하늘의 하늘빛 그리고 하늘을 뒤덮는 은은한 분홍빛은 그 색채만으로도 사람에게 충분히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하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지나갈 수 있었던 내 군생활은 1지망을 백령도로 선택하며 달라졌고, 여기서 수많은 경험들을 하며 더욱 나에게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그 과정에서 나와 함께한 하루하루의 날씨들은 그 경험들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주었고, 백령도를 선택했음을 후회하지 않게 해주었다. 이 좁은 섬에 갇혀 군생활을 8개월이나 더 해야 한다는 건 안타깝지만, 이 2년 동안의 경험들이 쌓여 나의 인생에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위의 날씨들도 사회에서 다 경험해보고 느껴본 어쩌면 단순한 대기의 변화일 수 있지만, 이 날씨의 변화마저 민감하게 느끼고 그를 통해 정서가 불러일으켜진 건 군대에 와서가 처음이다. 사회에서 일에 치여 살며 사소한 것들을 느낄 수 없었지만, 늘 반복되는 군대에서의 일상이 주는 답답함을 이겨내기 위해 사소한 것들을 찾는 여유와 행복을 얻었다. 사회에 나가면 지금 간절히 원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권리 뒤에 수많은 책임이 따르며 이는 나를 무겁게 짓누를 것임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그렇기에 군생활을 하며 날씨라는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것이 사실 지금만 느낄 수 있는 커다란 행복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