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 씨 오늘 휴게시간 전에 잠깐 대화 좀 할까요?”
원래 같았으면 점장님과 근무 시간 중에 틈틈이 대화를 했는데,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자고 하셨던 건 처음이었다.
면담을 앞둔 학생처럼 그동안 실수한 게 있었는지 잘못한 건 없었는지, 머릿속에 며칠간 있었던 일을 빠르게 다시 떠올렸다.
차가운 공기가 등 뒤로 스며드는 듯했다. 하지만 점장님의 말투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요새 좀 힘든가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눈을 잘 못 마주쳤다. 당시 집에 돈 문제 관련해서 일이 조금 있었는데, 직장에 털어놓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본인은 꿈을 찾겠다고 나와 있는 상황에서 나오는 이상한 죄책감과 함께,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눈에 띄게 도움을 드리지 못해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내 무능함에서 느껴지는 한심함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힘들 수 있죠. 다 알고 있는데, 그게 일할 때 너무 티가 나요. 우리는 이끌어가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데 한 사람이 그렇게 다운되어 있으면 주변 사람들까지 그 기분이 전이되잖아요. 더군다나 매니저가 그러면 안 되죠.
서연 씨 예전에 저한테 같이 일해보고 싶다고 했었잖아요. 그 생각에 변화가 생겼나요?”
점장님은 사람을 다루는데 능숙한 분이셨다.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시면서도 겁을 주려는 의도는 단 하나도 없었다. 점장님은 언제나 나에게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분이기도 했다. 내가 처음 일을 배울 때 실수를 하더라도 큰 소리로 꾸짖는 법이 없었고, 항상 나를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조언을 주셨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를 비난하거나 혼내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그 말속에는 ‘더 잘할 수 있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그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그건 아니죠.”
“그때 서연 씨 말하면서 눈이 진짜 반짝였어요. 그런 대화 나눌 때마다 머리도 엄청 돌아가고 같이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눈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요.”
나는 매니저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친 직원들을 다 함께 파이팅 해서 끌어올려줘도 모자랄 판에 같이 함께 끌어 잡아당기고 있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와 비교하면, 나는 확실히 실력적으로 성장했다.
내가 그동안 집중해 온 건 업무의 기술적인 성장이었다. 더 나은 성과, 더 빠른 해결책, 더 뛰어난 관리 능력.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아직 많이 미성숙했다.
내 기분이 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조차 없었고,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거나 지친 기색을 드러내는 내 모습이 주변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점장님의 말은 나에게 매니저로서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아빠와 통화는 필요했다.
“아빠 오늘은 좀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아빠가 말했던 거 다 잊어버려 딸”
나는 도움이 되고자 아빠에게 돈을 드렸다. 금액을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 막 스무 살인 나에겐 전재산이나 다름없던 돈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 돈 가지고 생색 따위를 낼 생각이 아니었다. 난 그저 아빠가 편안히 자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아직은 부모가 아니라 아빠의 마음을 전부 헤아리긴 어렵다. 아빠는 나에게 말로 표현 못 할 미안함을 느끼고 계셨던 것도 같고, 딸이 다 컸다는 생각도 하셨을 것 같고, 이제 막 사회인이 된 딸에게 손을 빌렸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가장 큰 감정은 속상함이었겠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뿐이었다.
“아빠 힘내 알겠지?”
“그럼 딸. 사랑해”
“나도 사랑해. 오늘은 오래 자려고 해 봐 아빠”
나는 아빠가 밉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라왔고 지금도 부족함 없기에. 다치지 않고 예쁘게 키워주셔서 말로는 다 못할 감사함뿐이다. 그저 난 타지에서 맘 편히 혼자 지내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 죄송했다.
아빠는 근심이 많으면 잠을 못 주무신다. 새벽 세시에 나와도 거실에 앉아계셨고 아침 여덟 시에 가도 그 자리 그대로 누워계실 뿐이었다. 하루종일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덜어내고, 무능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더 빨리 성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