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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봄 May 09. 2024

좋은 사람 옆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왜 그렇게 마음을 아끼냐고


마음을 꽉 틀어막고 괴로워하는 도영을 향해 진상이 내뱉은 대사, 2016년에 방영한 드라마 『또 오해영』 속 가장 아끼는 문장이다. 죽는 순간 생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주인공이라니, 설정도 흥미롭지만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도 애달픈 마음을 전하지 못해 후회하며 울던 젖은 눈이 내내 마음에 밟혔다. '대체 사랑이란 무엇이기에 죽는 순간에도 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울먹이는가'란 물음이 한동안  내 안에 가득 찼던 것 같다.




사랑을 떠올릴 때면 자주 꺼내 읽는 그림책이 있다.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에는 백만 년 동안 죽고 살았던 얼룩 고양이가 등장한다. 백만 명의 사람이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죽었을 때 울었지만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고양이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한때 고양이는 도둑고양이로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어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 암고양이들이 너도나도 신부가 되기 위해 아양을 떨 때마다 고양이는 말했다. 


"나는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새삼스럽게 이런 게 다 뭐야!"


하얀 고양이에게 구애하는 얼룩 고양이


그러다 자신에게 조금도 관심 없는 고양이를 만나며 더 이상 “백만 번이나...”란 말을 꺼내지 않는다. 하얀 고양이를 위해 공중 돌기를 하고, 그녀 곁에 머물며 구애한다. 가정을 이루고 새끼를 낳으며 자기만 좋아하던 얼룩 고양이는 서서히 변해 간다. 이제 얼룩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오래오래 살고 싶다.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 앞에 목놓아 우는 얼룩 고양이


할머니가 된 하얀 고양이가 조용히 움직임을 멈춘 어느 날, 고양이는 처음으로 운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백만 번이나 운다. 그렇게 아침이 되고 또 밤이 되고, 울음을 그친 어느 날, 고양이도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춘다.


백만 번의 삶과 죽음을 경험한 얼룩 고양이가 영영 되살아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작가는 이 특별한 고양이의 삶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작가인 사노 요코는 1938년에 태어나 일본의 패전 이후 남동생과 오빠의 죽음을 겪는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불화했으며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 죽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쓴 에세이 제목은 ‘사는 게 뭐라고’‘죽는게 뭐라고’다. 삶을 농담처럼 냉소하고 즐긴 이 독특한 할머니는 암 선고를 받고도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결코 징징거리는 법이 없다. 늙음, 죽음, 암에 대해 말하는 작가의 글들은 슬프기보다 웃기다. 암이 재발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재규어를 사고, 담배를 끊지 않는다. 그녀는 결코 병이라는 싸움에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인생의 마지막을 즐긴다.


문득 백만 번의 윤회를 거듭하며 “백만 번이나 살아봤다며” 으스대던 얼룩 고양이와 작가가 닮았다고 느꼈다. 자신의 죽음 따윈 아랑곳하지 않던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의 죽음 앞에 백만 번이나 울며 윤회의 고리를 끊는다. 자신의 죽음에 초연하면서도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에 언제라도 눈물을 흘린다던 작가의 세계관이 녹아든 그림책이다.




얼룩 고양이가 누구의 소유를 벗어나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었듯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간 즈음 진짜 자신과 마주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아이를 낳는 과정을 거치지 않더라도 ‘자유로운 나’로 존재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특별하다. 백만 번의 삶을 사는 동안 고양이는 상상을 초월한 신기한 일들을 셀 수 없을 만큼 경험했을 것이다. 그 모든 생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았던 그가 사랑하는 존재를 만나며 평범하지만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고 난생처음 그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처음으로 바랐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생을 반복하는 동안 그때는 없었고 지금은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백만 번의 죽음이 단 한 번도 두렵지 않았던 얼룩 고양이는 사랑하는 존재의 부재를 경험하며 비로소 생의 의미를 깨닫는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도 시간에 갇힌 남자가 등장한다. 잘 나가는 기상 캐스터 필은 성촉절 취재를 위해 촬영을 나갔다가 폭설을 만나 발이 묶인다. 하룻밤을 묵고 떠나려는데 어제와 완벽하게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오늘' 속에 갇힌다.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니 평소 못 해 본 장난을 치지만 그마저도 지겹다. 반복되는 날들에 환멸을 느낀 후 마구 먹고, 온갖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그래도 일어나면 다시 어제의 그 시간이다.


의미 없는 하루를 반복하던 중 함께 온 신임 프로듀서 리타의 순수한 마음에 끌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매일 열심히 관찰하고 호감을 얻으려 노력하지만 진실한 마음을 꿰뚫어 보는 그녀의 눈을 피해 갈 순 없다. 지금까지 자신만 사랑하며, 자기밖에 몰랐던 필은 리타를 만나며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리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돕고, 새로운 일들에 도전한다. 지루하기만 했던 오늘이 신기하게 즐겁고, 반복되는 하루가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똑같은 일상인데 그 속의 필은 매일 새로운 삶을 산다. 리타의 마음을 얻으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지만 다음 날, 또 다음 날을 맞는 필의 표정은 점점 더 빛난다. 영화 초반, 무뚝뚝과 시크함으로 무장했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실망, 환희, 기대로 가득한 표정은 변화무쌍하다. 단지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살기 시작한 것뿐인데,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니... 영화와 그림책, 다른 듯 닮은 두 작품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픈 메시지를 또렷이 그릴 수 있었다.


사랑, 사랑, 사랑


산다는 건 사랑의 다른 이름일까?

사랑 없이 사는 일은 백만 년을 살아도 아무 감흥 없던 고양이의 삶과 닮았다. 똑같은 어제를 살며 어떻게 죽을까 매일 고민하던 필과도.


고단한 밤, 내 옆에 작고 귀여운 존재가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바쁜 출근길, “엄마, 나 혼자 옷 입고 있어.” 해사한 얼굴로 아이가 웃는다. 나도 따라 웃는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오직 나의 안위를 돌보는데 온 마음을 쏟았다. 간혹 부모님과 동생, 친구를 생각했지만 나만큼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 세상은 아이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이의 모든 감정이 고스란히 엄마에게 스며들다니 신기하다. 남편과 아이들, 내 존재의 이유가 그들 속에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아이의 모든 감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아이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아이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일들도 아이를 위해 견딘다. 백만 번의 생을 살고 죽었으면서도 단 한 사람,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고양이처럼 아이들과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 아이가 사는 세상이 좀 더 살만한 세상이길, 아이가 두려움 없이 씩씩하게 자기 앞의 생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 마법 같은 말을 오늘도 사랑하는 존재에게 속삭인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작가소개


글.그림  사노 요코


일본의 작가, 에세이스트, 그림책 작가. 1938년 중국의 베이징에서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불화, 병으로 일찍 죽은 오빠에 관한 추억은 작가의 삶과 창작에 평생에 걸쳐 짙게 영향을 끼쳤다. 무사시노 미술대학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백화점의 홍보부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1967년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 베를린 조형대학에서 석판화를 공부했다. 1971년 『일곱 장의 잎―미키 다쿠 동화집』으로 데뷔했다. 일본 그림책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100만 번 산 고양이』를 비롯해 『아저씨 우산』, 『나의 모자』(고단샤 출판문화상 그림책상),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등 수많은 그림책과 창작집, 에세이집을 발표했다. 그림책으로 산케이 아동출판문화상, 고단샤 출판문화상, 일본 그림책상, 쇼가쿠간 아동출판문화상 등을 수상했고, 어렸을 적 병으로 죽은 오빠를 다룬 단편집 『내가 여동생이었을 때』로 제1회 니미 난키치 아동문학상, 만년에 발표한 에세이집 『어쩌면 좋아』로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수상했다. 2003년 일본 황실로부터 자수포장을 받았고, 2008년 장년에 걸친 그림책 작가 활동의 공로로 이와야사자나미 문예상을 받았다. 2004년 유방암에 걸렸으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자각하고도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시즈코 씨』,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등 말년까지 에세이집을 왕성하게 발표했다. 2010년 11월 5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암으로 만 7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출처] 네이버 작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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