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바 알못 작가가 써보려 노력한 연애소설 단편

세상 어디에도 없는 와인바인데요 일단 영업은 합니다

by 유경

아아 왜 나는 도무지 제대로 사랑할 수가 없을까요.


여자는 몇 개의 어절들을 날숨에 섞어 내뱉고는 눈을 두어 번 치켜떴다.술잔 옆에 쓰러져 팔을 베고 눕는 동작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렸다. 어정쩡하게 엎드린 여자가 이내 눈을 감았다. 어두운 조명이 켜진 바 안에서 와인잔을 닦던 남자가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달력을 본다. 그저께, 어제, 그리고 오늘의 날짜 아래에 빨간 점이 찍혀 있다. 여자가 바에 찾아오기 시작한 날부터 남자는 날짜 아래에 빨간 마카로 점을 찍었다.


작은 동네의 외진 골목 한 귀퉁이에, 그러니까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지나칠 법한 어떤 장소에 남자의 가게가 있었다. 땅값이 매일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는다는 서울의 한 귀퉁이에서, 손님이 들락날락하는 일이 도무지 없을 것만 같은 그곳에서 남자는 꽤 오래 술을 들이고 술을 따르고 가게 문을 열고 닫았다. 그렇게 두 계절을 버티다 보니 단골들이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주로 오갈 곳 없는 외로움을 달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의 술집을 자주 찾았다. 며칠 전 투병중이던 어머니를 떠나보낸 여자부터 사랑하던 여자를 음주운전 뺑소니로 잃은 남자, 가난 탓에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틀어야 했던 예비 여대생, 죽음을 앞둔 노부부 등이 가게의 단골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가게는 둘 이상의 손님으로 붐비는 일이 없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꼭 한 명씩 찾아와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곤 했다. 그들은 덤덤히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운을 띄우고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결말까지 서술한 후 조용히 맞은편 찬장의 와인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남자는 그들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 즈음 어딘가에서 와인병을 꺼내 잔이 반쯤 찰 때까지 따라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랬듯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들은 낡은 기계처럼 울기 시작했다. 고여 흐르던 배수구에 내리는 빗소리처럼 다소 어설픈 울음소리로 오랫동안, 슬픔을 자의로 연주하며 울었다.


여자는 그 날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다시 가게를 찾았다. 달력의 빨간 점이 찍힌 페이지가 두어 장이 넘어가고 나서였다. 남자의 옷이 가디건에서 까만 코트로 변한 어느 날, 여자가 눈이 내려앉은 빨간 우산을 털며 그의 가게를 다시 찾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가장 가장자리 안쪽을 택한 여자가 코트를 벗어 등받이에 걸며 운을 띄웠다. 바 안의 작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던 남자가 그제서야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으며 일어섰다. 들어오는 여자의 인기척을 미처 듣지 못한 것이리라. 가볍게 인사를 한 그가 의자를 끌어다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뭘로 하시겠어요, 하는 말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더 훌륭한 질문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여자가 눈을 또렷하게 뜨고 남자의 가슴께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한참 동안이나 가슴께를 내주었다.


이제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믿지 않아요.


남자는 잠깐 어떤 술을 따라야 하나 고민했고, 여자는 벽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떨구었다. 두 사람은 함께 웅웅거리는 보일러 소음을 들으며 가만히 있었다. 남자는 소음의 리듬에 맞추어 조용히 다음 말을 골랐다. 사랑에 대한 불신을 말하는 이에게 무슨 말이 필요한지 남자는 몰랐다. 무작정 괜찮을 거예요, 하고 희망을 심어주기에는 여자의 마음이 사막만큼이나 황량해 보였고, 그렇다고 원래 다 그런 거예요, 하고 생채기 위에 대충 거즈를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는 그런 부류의 책임감 없는 위로를 질색했다. 울음을 꾹꾹 눌러 다락방에 눌러넣게끔 하는 무책임한 말들.


답답한 듯 제 어깨를 두어 번 주무른 그가 잔을 두 개 꺼냈다. 드레이프를 끌어다 가볍게 잔을 닦아 하나는 자신 앞에, 하나는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미동이 없는 여자를 다시 한참 보던 그가 길다란 바에 팔을 짚고, 여자에게만 들릴 법한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로 마실래요. 취향이 어떻게 돼요? 여자가 게슴츠레 실눈을 뜨더니 반문했다. 어떤 취향일 것 같은데요? 대답 대신 역으로 질문을 받은 남자가, 한 번 웃었다. 뭐, 삶의 맛인지 희망의 맛인지 둘 중 하나겠죠?그의 대답에 여자가 입꼬리를 올려 따라 웃었다. 남자는 익숙하게 몸을 돌려 병을 두 개 골라 각각 따랐다. 여느 때처럼 반 잔, 붉은 것과 투명한 것. 남자의 움직임을 보던 여자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오늘은 단 맛이 좋겠네요, 하고. 남자가 웃으며 투명한 잔을 여자 앞에다 밀어주었다. 그래요. 나도 오늘은 당신 삶이 어땠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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