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연신 손으로 바람을 부쳐도 와닿지 않는 무더운 날이었습니다. 얄궂은 여름이 드디어 올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벌써 달력이 많이 넘어갔음을 깨닫습니다. 두 달 동안 계속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을 살아오던 나는, 이제 한여름의 초입에 맞닥뜨리고 섰습니다.
당신의 뒷모습을 보던 날에, 나는 당신이 내 삶의 마지막 남은 한 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놓으면 내 삶에서 내일이란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죄책감인지 서운함인지 모를 감정 탓에 나는 나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미안합니다. 희미한 눈을 한 당신 앞에서, 당신의 지친 눈가를 보면서도 그저 윽박질렀습니다. 왜 나를 온전히 담지 못하느냐고, 왜 내 손을 그리 쉽사리 놓느냐고 목이 쉬어 피 맛이 올라올 때까지 바락바락 악을 썼습니다. 내 삶의 낱장들을 우악스럽게 잡고는 나는 이것들을 단숨에 뜯어낼 거라고, 이제 내 삶의 나머지는 없다고 당신에게 으름장을 놓았어요. 그때 잔뜩 구겨졌던 자국들이 아직도 내 발자국 위로 선명합니다.
잘 지내나요?
아직도 당신과 함께한 겨울을 생각하면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이는 것도 같습니다. 당신의 코트 어깨 위로 내려앉던 눈송이들, 젖어 늘어지던 공들여 손질했다던 머리칼, 입을 열 때마다 피어오르던 입김과 발그레한 당신의 얼굴. 당신의 얼굴은 유독 그 겨울날 하얬더라지요. 시간을 더 거슬러 더운 여름날, 당신과 나누어 먹던 편의점 아이스크림과 밤을 닮아 투명한 남색의 공기를 가르며 걸었던 당신의 집 앞 아무도 모르는 좁은 골목, 근처 공원에서 가볍게 마시던 초록색 술병.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당신이 총천연색으로 선명합니다.
.
가끔 후회합니다. 당신과 세 개의 계절을 보낸 것을 말입니다. 당신과 가을만을 함께했더라면, 아니면 봄이나 겨울만 함께했더라면 나 지금 딱 그 계절에만 놓일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나 아마 당신을 회고할 때마다 오늘처럼 때 아닌 감기에 걸리지 않아도 될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오늘도 나, 가을과 겨울 봄 그 세 계절의 사이에 놓여 잔기침을 내뱉습니다. 뱉어도 뱉어지지 않는 그것을, 수어 달 동안의 당신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같은 시간을 다른 길을 걸으며,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듣고 다른 것을 꿈꾸며 우리는 여전히 존재해야만 합니다. 얼마만큼의 시간을 더 앓아야 할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쉽사리 낫지 않을 것 또한 압니다.
앞으로 남은 당신의 수많은 낱장들에, 수많은 계절들에 내가 없더라도 부디 별 탈 없이 지내길 바랍니다. 당신이 언제까지고 안녕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