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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혜 May 19. 2023

암 환자가 경험하는 다섯 개의 감정 - 2

수용에 이르기까지

분노가 분노로 머무르다 사라지만 괜찮겠지만, 그 사이에 나의 내적귀인이 발동한다. 결국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그 습관 말이다.

 

타협을 건너뛰고 곧바로 우울 단계가 시작되었다. “아오! 이 지긋지긋한 세상! 진짜 더럽게 힘들게 하네!”라고 원망하며 끝냈으면 차라리 덜 우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지적 습관은 매우 자동적으로 굴러간다.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나는 더 많이 스스로 책임을 묻는 사람이었다. 내가 대처할 수 있는 일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수없이 지난날을 복기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내가 뭘 잘못했던 걸까.

나는 결국 운도 없는 사람인 걸까.

암에 걸린 건 내가 운동도 안 하고 게을러서 그랬을지도 몰라.

아무거나 막 먹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

평소에 화가 너무 자주 나는 내 성격 때문에 몸이 아픈 걸까.

내 성격이 안 좋아서 벌을 받는 걸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무슨 저런 답답한 생각을 하고 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들을 갖고 있다. 인지심리학에서 ‘자동적 사고’라고 불리는 생각들이다. 휙휙 지나가는 자동적 사고를 붙잡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왜 자책감이나 우울감을 느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뿌옇던 마음이 또렷해지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인지치료에서는 자동적 사고를 추려낸다. 그리고 하나씩 반박한다. 사실인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 사실이 아닌 부분은 얼마나 되는지 치료자와 함께 따져보는 것이다. 정말로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 내 마음의 소리들은 대부분 많이 왜곡되어 있다. 따져보면 사실이 아닌 것들이 많다.



그래서 일단 내 탓을 줄이기로 했다. 길을 가다가 정말 운 없이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암에 걸린 것도 내 잘못이 아니라 운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강에 소홀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동안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을 모두 부정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을 피하지도 억누르지도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감정을 다루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회피와 억제는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정서조절 방법이지만 감정이 해소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울고 싶으면 울고, 화가 나면 혼잣말로라도 화를 냈다. 암이라는 사실을 수용하기 위해 다른 감정들을 충분히 경험하고 표현해야 했다.




일주일 동안 수많은 감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갑자기 밀려올 때도 있었고, 잔잔하게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 고요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내 마음이 어느 정도 준비를 끝낸 걸까. 여동생과 함께 세침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다. 갑상선 유두암이었다. 대기실에 앉아 동생의 어깨에 잠시 기대었다. 동생은 괜찮을 거라며 토닥여줬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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